스타크래프트 연대기 29화 · 고향을 폭파하는 사람들
이 글의 목차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아둔의 창에 모여든 상처 입은 생존자들

아둔의 창 내부는 수천 년의 침묵을 깨고 쏟아져 들어온 피난민들의 발소리로 가득 찼다. 거대한 함선의 금속 복도마다 절망에 빠진 프로토스들이 무리 지어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칼라의 빛 속에서 하나였던 칼라이들은 이제 신경삭이 잘려 나간 채 끔찍한 고립감에 몸을 떨었다.
그들 사이로 어둠의 기사단, 네라짐들이 경계 어린 시선으로 순찰을 돌고 있었다. 오랫동안 칼라를 거부해 온 그들에게는 이 상황이 낯설지 않았으나, 고통스러워하는 동족을 보는 눈빛에는 연민과 긴장이 교차했다. 두 부족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둔 듯 섞이지 못했다.
아르타니스는 함교의 높은 단상에서 그 혼란스러운 광경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제라툴이 자신의 신경삭을 끊어내며 목숨을 바친 순간의 묵직한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젊은 신관의 어깨에는 이제 아이어를 잃은 슬픔뿐만 아니라 이 부서진 종족 전체를 이끌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이 얹혀 있었다.
한 칼라이 광전사가 잘려 나간 신경삭의 단면을 감싸 쥐며 바닥에 엎드려 오열했다. 그의 곁을 지나던 네라짐 추적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으나, 광전사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그 손을 쳐냈다. 칼라가 사라진 빈자리는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자아의 일부가 뜯겨 나간 듯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아르타니스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짧아진 신경삭은 이 함선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현실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상징이었다. 신관이 다가오자 오열하던 광전사도, 경계하던 네라짐도 일제히 숨을 죽이고 그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오늘 많은 것을 잃었다.” 아르타니스의 목소리가 넓은 홀을 울렸다. “칼라의 빛은 아몬의 어둠에 오염되었고,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그 연결을 끊어내야만 했다. 이 고독은 끔찍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아몬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는 가장 고귀한 증거다.”
그의 말에 몇몇 칼라이들이 고개를 들었고, 네라짐들은 조용히 무기를 거두며 경의를 표했다. 아둔의 창이라는 거대한 물리적 요새가 그들의 육신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진정으로 이들을 지탱해야 하는 것은 부서진 마음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결속력이었다.
아르타니스는 상처 입은 광전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굳건한 눈빛을 보냈다. 이 거대한 함선 안에서 서로 다른 철학과 상처를 가진 자들을 진정한 하나의 기사단으로 벼려내는 것. 그것이 제라툴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만드는 신관으로서의 첫 번째 시험임을 그는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깨어나는 함선과 지도자들의 엇갈린 시선

함선의 심장부인 태양 코어실에서 차원 장인 카락스는 쉴 새 없이 기계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의 기술력이 그의 손길을 거쳐 서서히 맥박을 뛰기 시작했다. 거대한 인공 태양이 뿜어내는 눈부신 황금빛 에너지가 코어실 전체를 따뜻하게 채웠다.
“신관이시여, 아둔의 창이 마침내 완전히 깨어났습니다.” 카락스가 함교로 들어서며 상기된 목소리로 보고했다. “이 함선의 동력원은 단순한 기계가 아닙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이 이룩한 기술의 정점이며, 현재 생존한 모든 프로토스를 수용하고도 남을 자원을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그의 열띤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짙은 그림자 속에서 대모 보라준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표정은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네라짐을 상징하는 특유의 어두운 기운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보라준은 카락스가 극찬하는 고대의 유물을 탐탁지 않은 눈길로 훑어보았다.
“칼라이의 유산이 훌륭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보라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하지만 내 백성들은 수백 년 동안 칼라의 통제 없이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해 왔다. 이 함선의 거대한 체계 속에 네라짐이 그저 부속품처럼 편입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신관.”
카락스는 당황한 듯 기계 팔을 움찔거렸다. “대모님, 오해하셨습니다. 이 함선의 시스템은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무기 체계와 동력망을 통합해야만 아몬의 군단에 맞설 수 있는 효율적인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통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협력입니다.”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전통과 방식을 지우려 한다면, 그것이 아몬의 방식과 다를 게 무엇인가?” 보라준의 목소리에 서늘한 날이 섰다. “네라짐은 그림자 속에서 걷는다. 우리는 우리만의 공간과 규율이 필요하다.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 함선은 또 다른 감옥일 뿐이다.”
아르타니스는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대모의 말이 맞다. 우리는 칼라라는 하나의 생각에 묶여 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카락스, 네라짐의 독립적인 구역과 전술적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함선의 내부 구조를 재조정하라.”
카락스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숙여 명령을 받아들였다. 보라준 역시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적대감을 거두었다. 함교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불신의 벽이 존재했지만, 생존이라는 절대적인 명제 아래 그들은 위태롭고도 필수적인 동맹의 첫 단추를 꿰고 있었다.
칼라의 그림자에 갇힌 계승자

정지장 블록의 깊은 곳, 차가운 푸른빛이 감도는 방 안에서 계승자 로하나가 눈을 떴다. 그녀의 등 뒤로는 길고 온전한 신경삭이 아름답게 늘어져 있었다. 수천 년의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본능적으로 칼라에 접속하여 동족들의 따뜻한 사념을 찾으려 의식을 확장했다.
그러나 그녀를 맞이한 것은 수십억 프로토스의 조화로운 노래가 아니었다. 끔찍하고 끈적한 어둠이 칼라의 연결망을 타고 그녀의 정신을 덮쳐왔다. 그것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타락한 젤나가, 아몬의 의지였다. 로하나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너희의 시대는 끝났다… 모든 것은 나의 계획대로 소멸할 것이다.” 아몬의 속삭임이 그녀의 뇌리를 긁어내듯 울려 퍼졌다. 로하나는 계승자로서 단련된 강인한 정신력으로 그 침식에 저항했지만, 온전한 신경삭을 통해 밀려오는 아몬의 압도적인 힘은 그녀의 정신을 빈틈없이 압박해 왔다.
아르타니스가 다급히 정지장 블록으로 들어섰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로하나를 본 그는 즉시 사이오닉 검을 활성화하며 다가갔다. “계승자여! 당장 신경삭을 끊어내야 하오. 칼라는 더 이상 우리의 안식처가 아니오. 아몬이 그 연결을 통해 우리 형제들을 노예로 만들었소!”
“안 됩니다!” 로하나가 고통으로 온몸을 떨며 아르타니스의 손을 밀쳐냈다. “칼라는… 우리 종족의 역사이자 영혼입니다. 수천 년의 기억과 지혜가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끊어내는 것은 프로토스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계승자로서 이 기억을 지켜야만 합니다.”
“죽음과 노예화 앞에서는 그 어떤 위대한 역사도 무의미하오!” 아르타니스가 안타까움 섞인 분노로 소리쳤다. “당신의 고집이 함선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소. 아몬이 당신의 정신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나는 내 손으로 당신을 베어내야 할지도 모르오.”
로하나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결연한 눈빛으로 신관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견뎌내겠습니다. 아몬의 어둠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의 빛을 찾아내어 보존하겠습니다. 저의 의지는 그토록 나약하지 않습니다. 제발… 저의 신경삭을 자르지 말아 주십시오.”
그녀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불안정한 사이오닉 전류와 흔들리는 눈빛은 그녀의 주장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보여주고 있었다. 아르타니스는 검의 빛을 거두며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그는 로하나를 강제로 제압하는 대신 정지장에 다시 가두는 것을 택했지만, 그녀의 등 뒤로 늘어진 신경삭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보였다.
샤쿠라스를 뒤덮는 아몬의 군단

함교의 붉은 경보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귀를 찢는 듯한 사이렌 소리를 뿜어냈다. 전술 디스플레이 화면 위로 네라짐의 고향 행성, 샤쿠라스의 궤도에 무수히 많은 생체 신호가 쏟아져 내리는 광경이 투사되었다. 그것은 아몬의 지배를 받는 저그 군단과 혼종들의 거대한 무리였다.
영원한 황혼에 잠겨 있던 샤쿠라스의 하늘이 저그의 낙하 주머니들로 인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수백 년 동안 어둠의 기사단을 품어주었던 은신처가 이제는 끔찍한 포식자들의 사냥터로 변해버렸다. 지상에서 보내오는 다급한 구조 신호들이 함교의 통신망을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보라준은 디스플레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화면 속 붉은 점들은 이미 수도 탈레마트로스의 외곽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곁에 선 아르타니스는 그녀가 느끼는 절망의 깊이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탈레마트로스 시가지에 저그가 진입했습니다! 민간인 거주 구역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관측관의 다급한 보고가 함교를 울렸다. 지상의 네라짐 전사들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와 저그를 썰어 넘겼지만, 쓰러진 자리에 열 배가 넘는 괴물들이 끝없이 밀려드는 절망적인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즉시 대규모 차원망을 가동하라! 아둔의 창을 궤도에 고정하고 모든 피난선을 함선으로 유도한다!” 아르타니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함선의 거대한 차원 관문들이 일제히 열리며 지상의 생존자들을 끌어올리기 위한 푸른빛의 연결 통로를 형성했다.
그러나 저그의 공세는 피난의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대공 촉수들이 피난선들을 향해 산성 포자를 뿜어냈고, 공중을 뒤덮은 뮤탈리스크 떼가 차원망의 연결을 방해하기 위해 자폭 공격을 감행했다. 샤쿠라스의 지표면은 순식간에 피와 점막으로 뒤덮인 생지옥으로 변해갔다.
보라준은 자신의 상징인 차원 낫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강직될 정도로 힘을 주었다. 아이어에서 도망쳐 온 칼라이들을 받아주었던 자비로운 고향이, 이제는 그 피난민들과 함께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고 있었다. 대모로서 백성들의 비명을 듣는 것은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재래식 방어선으로는 이 거대한 파도를 결코 막아낼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아몬은 단순히 행성을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라, 샤쿠라스에 있는 모든 프로토스의 씨앗을 말려버릴 작정이었다. 보라준의 눈빛에 깃들어 있던 슬픔이 서서히 차갑고 결연한 분노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고향을 불태우기로 한 대모의 결단

전략 회의실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 홀로그램 탁자 위에는 저그의 점막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샤쿠라스의 지도가 떠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보라준이었다. “신관, 샤쿠라스를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저 괴물들에게 우리의 고향을 온전히 넘겨줄 수는 없다.”
아르타니스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모, 방금 무슨 말을 한 것이오? 고향을 포기하는 것도 모자라 행성을 파괴하겠다는 뜻인가? 우리는 이미 아이어를 잃었소. 프로토스에게 남은 유일한 안식처마저 우리 손으로 부숴버릴 수는 없소!”
“아몬은 샤쿠라스를 자신의 군단을 번식시키는 거대한 둥지로 사용할 것이다.” 보라준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단호했다. “젤나가 사원의 에너지를 과부하시켜 행성의 핵을 타격하면, 샤쿠라스와 함께 저 끔찍한 군단 수십억 마리를 우주의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네라짐의 심장을 도려내는 짓이오! 수백 년간 당신들을 품어준 땅이 아니오.” 아르타니스의 만류에도 보라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네라짐의 방식, 즉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림자 속에 숨어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고통스러운 결단도 마다하지 않는 철학을 이야기했다.
아르타니스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아이어가 함락되던 날, 끝까지 고향을 지키겠다며 쓰러져간 수많은 기사단 형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토를 잃는다는 것은 종족의 정체성을 잃는 것과 같다고 믿어온 그에게, 스스로 행성을 파괴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금기였다.
그러나 그는 보라준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보았다. 대모는 자신의 손으로 고향을 불태우는 죄책감을 평생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땅을 지키다 종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땅을 버리더라도 백성을 살려 미래를 도모하겠다는 뼈아픈 희생정신이었다.
긴 침묵 끝에 아르타니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모의 뜻이 정 그렇다면… 따르겠소. 우리는 젤나가 사원을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파괴의 무기로 사용할 것이오. 이 끔찍한 결정이 훗날 우리에게 어떤 심판으로 돌아오든, 내가 그대와 함께 짐을 지겠소.”
결정이 내려지자 카락스와 공학자들은 즉시 사원의 에너지를 폭주시키기 위한 정밀한 계산에 돌입했다. 행성의 지각을 붕괴시키고 핵을 연쇄 폭발시키기 위해서는 사원 내부에서 직접 과부하 장치를 가동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방어선을 유지해야만 했다.
마지막 피난과 과부하되는 사원

샤쿠라스 지표면에 우뚝 솟은 고대의 젤나가 사원 입구는 최후의 방어선이 되었다. 아르타니스와 보라준은 직접 무기를 들고 전선의 맨 앞에 섰다. 잿빛 하늘 아래로 끝을 알 수 없는 저그의 해일이 사원을 향해 밀려들었고, 두 지도자의 사이오닉 검이 교차하며 피보라를 일으켰다.
“형제들이여, 물러서지 마라! 피난선이 모두 이륙할 때까지 단 한 마리의 괴물도 사원 내부로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 아르타니스의 외침이 전장을 갈랐다. 네라짐 암흑 기사들과 칼라이 광전사들은 종족의 구분 없이 어깨를 맞대고 죽음의 물결에 맞서 장렬히 싸웠다.
사원 뒤편의 이착륙장에서는 마지막 피난선들이 거친 엔진음을 내며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불타는 고향을 바라보는 네라짐들의 눈에서는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지에서 싸우는 전사들을 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 시각, 사원 중심부에서는 카락스의 원격 지시에 따라 에너지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젤나가의 결정체들이 불길한 붉은빛을 내뿜으며 진동했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에너지는 통제 불능의 상태로 치달으며 행성의 핵을 향해 쐐기처럼 파고들었다.
거대한 울트라리스크 한 마리가 방어선을 뚫고 돌진해 오자, 보라준이 그림자 걸음으로 순식간에 그 짐승의 등 위로 도약했다. 그녀의 낫이 짐승의 두꺼운 장갑을 뚫고 신경절을 끊어내는 순간, 사원 전체가 굉음을 내며 흔들렸다. 과부하가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신관! 에너지가 한계치를 넘었습니다! 지금 당장 귀환하지 않으면 폭발에 휘말립니다!” 통신기를 통해 카락스의 절박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르타니스는 주변의 생존한 전사들에게 즉각적인 철수를 명령했다. 전사들의 몸이 푸른 차원망의 빛에 휩싸이며 하나둘씩 전장에서 사라졌다.
보라준은 마지막으로 귀환 광선에 몸을 싣기 전, 점막으로 뒤덮인 샤쿠라스의 대지를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정신을 뒤흔드는 저그의 괴성 너머로, 수백 년간 네라짐을 품어주었던 밤바람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녀는 짧은 묵념과 함께 빛 속으로 사라졌다.
아둔의 창으로 귀환한 직후, 궤도에서 내려다본 젤나가 사원은 이미 거대한 빛의 기둥을 우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은 지각의 틈새를 타고 행성 전체로 거미줄처럼 퍼져나갔고, 샤쿠라스의 깊은 심장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연쇄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산산조각 난 황혼의 안식처

아둔의 창 함교의 거대한 주 관측창 너머로, 소리 없는 파멸이 펼쳐지고 있었다. 젤나가 사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행성의 적도를 따라 둥근 띠를 형성하더니, 이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섬광이 우주 공간을 집어삼켰다. 샤쿠라스의 지각이 거대한 덩어리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수십억 마리의 저그 무리와 함께, 네라짐의 찬란했던 역사와 기억이 담긴 대지가 산산조각이 났다. 행성의 핵이 폭발하며 만들어낸 거대한 충격파가 아둔의 창의 보호막을 거칠게 때렸다. 함선 전체가 요동쳤고, 그것은 마치 죽어가는 고향이 내지르는 마지막 단말마처럼 느껴졌다.
관측 갑판에 모여 있던 네라짐 생존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무릎을 꿇었다. 어떤 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오열했고, 어떤 이는 멍한 눈으로 우주를 떠도는 붉은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영원한 황혼으로 그들을 숨겨주었던 어머니 같은 행성은 이제 불타는 운석 떼로 변해버렸다.
보라준은 주 관측창 바로 앞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바위처럼 굳어 있어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지만, 곁에 늘어뜨린 그녀의 두 손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입으로 내린 명령이 가져온 참혹한 결과 앞에서 그녀는 묵묵히 형벌을 견디고 있었다.
아르타니스는 아무 말 없이 다가가 그녀의 곁에 섰다. 어설픈 위로나 동정은 이 거대한 상실 앞에서 오히려 모욕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그녀가 짊어진 끔찍한 죄책감과 슬픔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나누어 지려는 무언의 연대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칼라이 생존자들의 눈빛도 달라져 있었다. 아이어를 빼앗겼을 때 네라짐들이 내밀어 주었던 손길을 기억하는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네라짐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칼라의 연결 없이도 그들의 마음은 짙은 애도 속에서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서로를 밀어내고 불신하던 두 부족은, 이제 돌아갈 곳 없는 완벽한 우주의 미아라는 공통된 운명 앞에 섰다. 아이어에 이어 샤쿠라스마저 잃은 프로토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이 낡은 고대 함선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거대한 상실은 그들을 진정한 하나의 기사단으로 결속시키고 있었다.
“안녕히, 우리의 어두운 안식처여.” 보라준이 갈라진 목소리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고향의 잔해를 마음에 새긴 뒤, 단호하게 몸을 돌려 함교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제 그녀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파괴된 과거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미래였다.
과거를 끊어내고 미래를 선택한 로하나

샤쿠라스가 파괴되는 순간 발생한 거대한 사이오닉 충격파는 우주의 공허를 타고 정지장 블록에 잠들어 있던 로하나에게까지 도달했다. 동족들의 끔찍한 절망과 비통함이 칼라의 잔재를 통해 흘러들어오자, 그녀의 정신적 방벽이 크게 흔들렸다.
아몬은 그 미세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타락한 젤나가의 사악한 의지가 로하나의 신경삭을 타고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고향을 잃은 슬픔을 분노로 왜곡시키고, 그녀의 자아를 완전히 집어삼키려는 맹렬한 공격이었다. 로하나는 비명을 지르며 정지장 안에서 몸부림쳤다.
그녀의 두 눈이 프로토스의 푸른빛을 잃고 아몬을 상징하는 불길한 붉은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죽을 것이다… 너희의 헛된 발버둥은 끝났다.” 로하나의 정신으로부터 직접 울려 퍼지는 사이오닉 사념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천 개의 쇳소리가 섞인 듯한 아몬의 조롱이었다.
경보를 듣고 달려온 아르타니스는 사이오닉 검을 뽑아 들고 정지장 장치를 해제했다. “로하나! 정신을 차리시오! 아몬에게 굴복해서는 안 되오!” 그는 검을 치켜들었지만, 차마 오랜 지혜를 간직한 계승자를 베어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로하나의 내면에서는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몬의 어둠 속에서 그녀는 샤쿠라스를 희생하면서까지 생존을 택한 동족들의 결단을 보았다. 칼라가 없이도 슬픔을 나누고 하나로 뭉치는 새로운 기사단의 모습이 그녀의 굳건했던 오랜 신념에 균열을 냈다.
그녀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칼라의 영광스러운 과거는 이미 죽어버린 껍데기일 뿐이며, 지금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이 신경삭은 종족의 역사가 아니라 아몬이 채워놓은 노예의 사슬이라는 것을. 과거에 집착하는 한 프로토스에게 미래는 없었다.
“나는… 너의 인형이… 아니다!” 로하나가 온 정신을 쥐어짜내며 붉게 빛나는 눈으로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끝에 날카로운 사이오닉 에너지가 집중되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진 자랑스러운 신경삭을 향해 손을 내리쳤다.
섬광과 함께 굵은 신경삭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 순간 로하나의 눈을 덮고 있던 붉은빛이 씻은 듯이 사라졌고, 그녀는 깊은 탈진 상태에 빠져 아르타니스의 품으로 쓰러졌다. 수천 년의 기억을 잃은 상실감보다, 마침내 아몬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미래를 선택했다는 안도감이 그녀의 눈빛에 잔잔히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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