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 연대기 9화 · 안티오크의 문과 추방자의 손
이 글의 목차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아이어 안티오크를 지키는 살아 있는 페닉스와 집행관

아이어의 하늘은 더 이상 황금빛이 아니었다. 매연과 잿빛 구름이 안티오크의 사원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집행관은 관측창 너머로 끝없이 밀려드는 저그 군단을 내려다보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대지는 흉측한 점막으로 덮여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방어선의 외곽에서는 폭발의 섬광만이 번쩍였다.
전선의 최전방에는 안티오크의 수호자 피닉스가 서 있었다. 그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사이오닉 검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유일한 희망의 등대와 같았다. 피닉스는 히드라리스크들이 다가오자 주저 없이 적진으로 도약했다.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저그의 짐승들이 두 동강 나며 뒹굴었다.
하지만 적의 수는 압도적이었다. 쓰러진 저그의 사체 위로 새로운 무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며 프로토스의 방어선을 짓누르고 있었다. 광전사들은 어깨를 맞대고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발톱과 이빨에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집행관은 칼라를 통해 전해지는 동족들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 칼라의 연결망을 통해 피닉스의 강인한 의지가 울려 퍼졌다. 그의 정신은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오직 고향을 지키겠다는 투지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피닉스는 방어선이 무너지는 곳마다 가장 먼저 달려가 적의 공세를 막아냈다. 그의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병사들의 마음을 다잡아주는 구심점이었다.
집행관은 피닉스의 분투에 호응하여 즉각적인 전술 지시를 내렸다. 고위 기사들이 성벽 위로 도약하여 강력한 사이오닉 폭풍을 소환하자 번개 구름이 저그 무리를 휩쓸며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용기병들의 반물질 탄환이 하늘을 뒤덮은 뮤탈리스크들을 격추하며 지상군의 부담을 덜어주며 진형을 유지했다.
피닉스는 피로를 잊은 듯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울트라리스크가 두꺼운 장갑을 앞세워 돌진해오자 그는 교묘하게 몸을 비틀어 치명적인 일격을 피했다. 이어진 순간 피닉스의 사이오닉 검이 괴수의 두꺼운 목덜미를 정확히 꿰뚫었고 육중한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그의 무용은 짙은 경외감을 불렀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찰나에 불과했다. 지평선 너머에서 붉은빛을 뿜어내는 새로운 저그 무리가 마치 해일처럼 밀려오는 모습이 관측되었다. 집행관은 전술 디스플레이를 가득 채우는 붉은 점들을 보며 서늘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저그는 조직화된 군대였고 자원은 끝이 없어 보였다.
피닉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칼라를 통해 집행관에게 굳건한 결의를 전해왔다. 그는 안티오크가 아이어의 심장으로 향하는 길목이며 이곳이 뚫리면 동족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피닉스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성벽을 지키겠다고 맹세했고 집행관은 모든 예비 병력을 전선으로 투입했다.
정화와 구조 사이의 잔혹한 선택
![🎨 [AI 복원 일러스트] 안티오크의 점막으로 뒤덮인 전장에서 피닉스가 맥박치며 재생하는 저그 정신체 앞에 서 있는 모습.](/assets/resized/480/guides/starcraft-novel-009-section-02-20261008.webp)
방어선의 가장 취약한 우측 측면이 결국 저그의 맹렬한 공세에 찢겨 나갔다. 수백 마리의 저글링들이 무너진 성벽의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며 진형을 순식간에 유린했다. 광전사들은 사방에서 덮쳐오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었고 비명이 칼라를 울렸다. 집행관은 전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깨닫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 혼돈의 중심에는 저그 무리를 통제하는 거대하고 흉측한 정신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끔찍한 맥박을 뛰며 주변의 짐승들에게 끝없는 분노와 살의를 불어넣고 있었다. 프로토스 전사들은 저 흉악한 덩어리가 공세의 원흉임을 직감했다. 피닉스는 결사대를 이끌고 정신체를 향해 필사의 돌진을 감행했다.
치열한 혈투 끝에 피닉스의 사이오닉 검이 마침내 정신체의 두꺼운 외피를 가르고 그 흉측한 심장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거대한 괴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리자 주변의 저그 무리가 일순간 통제력을 잃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프로토스 병사들은 승리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환호했다.
그러나 경악스러운 광경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산산조각 났던 정신체의 파편들이 기괴한 점막과 융합하더니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재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부활한 정신체는 더욱 강력한 분노를 뿜어내며 흩어졌던 무리를 다시 결집시켰다. 아무리 죽여도 되살아나는 불사의 적 앞에서 절망감이 덮쳐왔다.
집행관은 끔찍한 딜레마에 직면했다. 고립된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하면 방어선 전체가 무너질 위험이 컸고 함포 사격으로 해당 지역을 정화하자니 수많은 동족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전술적 논리는 정화를 지시하고 있었지만 동족의 생명을 버려야 한다는 죄책감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피닉스는 칼라를 통해 집행관의 망설임을 읽고 단호한 의지를 전해왔다. 그는 단 한 명의 형제도 저그의 발톱 아래 버려둘 수 없다며 자신이 직접 후위 부대를 이끌고 고립된 병사들을 구출하겠다고 자원했다. 그것은 목숨을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지만 피닉스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굳건하게 빛났다.
끝없이 되살아나는 적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광전사들의 정신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칼라를 통해 전해지는 공포와 절망의 감정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져나갔고 일부 병사들은 무기를 든 손을 떨기 시작했다. 피닉스는 앞장서서 적의 무리를 베어 넘기며 흔들리는 병사들의 투지를 일깨우려 애썼다.
집행관은 피닉스를 믿고 방어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필사적인 지휘를 이어나갔다. 그는 예비 함대의 화력을 총동원하여 저그의 증원 경로를 차단하고 피닉스의 구출 부대가 퇴각할 수 있는 좁은 통로를 확보했다. 정화와 구조 사이의 잔혹한 선택은 병사들의 마음을 찢어놓았고 안티오크의 대지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대의회와 알다리스의 맹목적인 의심
![🎨 [AI 복원 일러스트] 아이어의 황금빛 대의회실에서 심판관 알다리스의 푸른 홀로그램이 집행관을 규탄하는 모습.](/assets/resized/480/guides/starcraft-novel-009-section-03-20261008.webp)
전장의 포연이 가시기도 전에 대의회의 홀에서는 차갑고 엄숙한 회의가 열렸다. 심판관 알다리스의 환영이 단상 위로 떠오르며 집행관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안티오크의 참상에 대한 위로의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알다리스는 오직 칼라의 율법만을 강조하며 재난이 누군가의 오만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비난했다.
알다리스는 차 행성으로 떠난 전임 집행관 태사다르의 행적을 강도 높게 규탄했다. 그는 태사다르가 대의회의 명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도 모자라 이단자인 암흑 기사단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맹렬히 비난했다. 심판관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혐오가 짙게 배어 있었고 반역 행위가 파멸을 불렀다고 단언했다.
대의회는 칼라의 빛을 거부하고 스스로 신경삭을 자른 네라짐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혐오했다. 그들은 공허의 힘이 프로토스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칼라의 조화를 파괴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알다리스는 태사다르가 그 타락한 자들과 어울리며 칼라의 가르침을 저버렸다고 주장하며 원로들의 지지를 선동했다.
나아가 알다리스는 저그 군단이 아이어를 침공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태사다르에게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태사다르가 차 행성에서 저그를 자극하고 불필요한 전투를 벌인 탓에 괴물들의 시선이 아이어로 향하게 되었다는 논리였다. 그는 태사다르의 오만함이 고향을 불바다로 만들었다며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
알다리스는 집행관에게 저그 방어전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임무를 하달했다. 그것은 바로 차 행성으로 함대를 이끌고 가 반역자 태사다르를 체포하여 아이어로 압송하라는 명령이었다. 고향이 불타고 동족들이 학살당하는 이 순간에 적이 아닌 동족의 영웅을 처벌하기 위해 병력을 빼내라는 명령은 납득할 수 없었다.
집행관의 내면에서는 심한 갈등이 소용돌이쳤다. 대의회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기사단의 의무와 눈앞에서 죽어가는 동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전장의 논리가 맹렬하게 충돌했다. 그는 알다리스에게 저그의 위협이 상상을 초월하며 힘을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고 항변했지만 심판관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알다리스는 집행관의 항변을 일언지하에 묵살했다. 그는 안티오크에서 정신체가 부활한 현상조차 기사단의 전술적 무능과 신앙심 부족 탓으로 돌리며 대의회의 판단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태사다르를 체포하여 기강을 바로잡는 것만이 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은 집행관의 가슴에 절망을 안겼다.
회의가 종료되고 홀로그램이 사라진 후에도 집행관은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종족의 존망이 걸린 거대한 전쟁 앞에서 지도층의 정치적 알력과 이념의 차이가 얼마나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는지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마음을 더욱 옥죄는 것은 동족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는 끔찍한 분열의 씨앗이었다.
쓰러진 영웅과 강철의 껍데기
![🎨 [AI 복원 일러스트] 무균 상태의 사이버네틱스 시설에서 새로 조립된 4족 보행 용기병 내부에서 피닉스의 의식이 깨어나는 모습.](/assets/resized/480/guides/starcraft-novel-009-section-04-20261008.webp)
집행관이 대의회의 부조리한 명령에 고뇌하는 사이 안티오크의 전황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저그의 끝없는 물량 공세에 결국 두 번째 방어선마저 무너져 내렸고 수천 마리의 저글링들이 들이닥쳤다. 피닉스는 남은 병력들을 독려하며 최후의 항전을 벌였지만 움직임은 둔해져 있었고 갑옷은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다.
피닉스가 밀려드는 히드라리스크 무리를 향해 검을 치켜세우려는 찰나, 그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사이오닉 검이 갑자기 빛을 잃고 소멸해버렸다. 개인 보호막과 차원 검의 동력 장치가 한계에 달해 완전히 방전된 것이다. 무기를 잃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피닉스는 물러서지 않고 맨손으로 적의 외피를 타격하며 처절한 육박전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불굴의 투지만으로 무기의 부재를 극복하기에는 적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어둠 속에서 좁혀온 히드라리스크들의 날카로운 뼈 발톱이 피닉스의 무방비한 흉갑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피닉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무릎을 꿇었고, 빈틈을 노린 저그 괴수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 그의 육신을 짓밟고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사령선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집행관은 칼라를 통해 피닉스의 육체가 갈가리 찢기는 끔찍한 고통과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분노가 그의 정신을 강타했고 곁에 있던 고위 기사들 역시 충격에 휩싸였다. 안티오크를 지키던 가장 위대한 방패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치열했던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후 프로토스 수색대는 참혹한 시체 더미 속에서 피닉스의 처참하게 훼손된 육신을 수습했다. 그의 몸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지만 뇌파는 아주 미미하게 생존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집행관은 슬픔을 억누르며 그를 정체장 캡슐에 안치하여 비밀 시설로 후송했다.
차가운 기계적인 소음만이 가득한 용기병 제작 시설의 내부는 전장의 뜨거운 열기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의료진은 피닉스의 훼손된 육신을 차가운 보존액이 가득 찬 중앙 탱크에 조심스럽게 이식했다. 잃어버린 팔다리를 대신할 거대한 기계 다리들이 결합되었고 신경망을 연결하는 고통스러운 수술이 진행되었다.
마침내 모든 연결이 끝났을 때 정체장 액체 속에서 피닉스의 의식이 서서히 깨어났다. 그는 낯선 감각에 혼란스러워했지만 이내 인공 시각 장치를 통해 강철로 이루어진 자신의 새로운 껍데기를 인식했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 속에서도 그의 굳건한 정신만큼은 온전히 보존되어 용기병의 장치와 완벽하게 동화되었다.
피닉스의 목소리가 기계적인 합성음을 통해 시설 내부에 울려 퍼졌다. 그는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한 새로운 생명이 아니라 단지 다른 형태의 전투복을 입고 기사단의 의무를 이어가는 것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선언했다. 육신은 파괴되었으나 고향을 수호하겠다는 그의 숭고한 결의 앞에 집행관은 깊은 경의를 표했다.
차 행성의 잿빛 하늘 아래 맺어진 동맹
![🎨 [AI 복원 일러스트] 차 행성의 화산 지대에서 금속 바리케이드 뒤에 함께 서 있는 짐 레이너와 태사다르.](/assets/resized/480/guides/starcraft-novel-009-section-05-20261008.webp)
아이어의 참상과 멀리 떨어진 차 행성의 표면은 끓어오르는 용암과 매캐한 화산재로 뒤덮여 있었다. 태사다르는 붉게 타오르는 하늘 아래 서서 끊임없이 분출되는 유황 가스를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의 곁에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수의 프로토스 생존자들이 진형을 유지했다.
그들의 반대편에는 짐 레이너가 이끄는 테란 특공대가 임시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낡은 전투복은 그을린 자국으로 가득했고 병사들의 눈빛에는 짙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종족도 신념도 달랐지만 저그라는 공통의 적 앞에서 두 집단은 기묘한 동맹을 맺고 서로의 등을 굳건히 맡기고 있었다.
레이너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태사다르에게 다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건넸다. 이 지옥 같은 행성의 열기 덕분에 굳이 불을 피우지 않아도 전투식량을 데워 먹을 수 있다는 그의 투박한 유머는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을 아주 잠시나마 느슨하게 만들어주었다. 태사다르는 절망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태사다르는 레이너와 그의 부하들이 보여준 놀라운 용기와 투지에 진심 어린 경의를 표했다. 한때 테란을 열등하고 미개한 종족으로만 여겼던 그의 오만했던 시선은 생지옥을 함께 헤쳐 나오며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들은 고도의 기술력은 없었지만 불굴의 의지와 전우애로 뭉쳐 있었고 태사다르는 기사단의 긍지를 엿보았다.
그러나 훈훈한 대화도 잠시 땅 밑에서부터 전해지는 불길한 진동이 그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차 행성의 저그들은 결코 사냥감을 포기하지 않았고 용암 지대 너머로 수백 마리의 저글링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쇄도해오는 모습이 관측되었다. 테란 병사들은 즉각 방어선으로 달려가 전투태세를 단단히 갖췄다.
태사다르는 눈을 감고 공허의 흐름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다가오는 저그 무리의 규모를 파악하는 동시에 우주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익숙한 사이오닉 파동을 감지하기 위해 애썼다. 짙은 절망 속에서도 그는 동족들이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마침내 함대의 에너지를 희미하게 느꼈다.
레이너는 태사다르의 표정 변화를 읽고 무언가 희망적인 징조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탄약을 아끼고 방어선을 굳게 지키라고 소리치며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가우스 소총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이 선두에 선 저글링들을 찢어발겼고 두 지도자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죽음의 물결에 당당히 맞섰다.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하늘의 잿빛 구름이 갈라지며 거대한 그림자가 화산 지대 위로 드리워졌다. 집행관이 이끄는 프로토스 함대가 마침내 차 행성의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우주모함들이 쏟아내는 융단 폭격이 저그 무리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태사다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추방자들
![🎨 [AI 복원 일러스트] 차 행성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광전사들과 제라툴의 암흑 기사단 사이의 긴장된 대치 상황을 중재하는 태사다르.](/assets/resized/480/guides/starcraft-novel-009-section-06-20261008.webp)
집행관의 함대에서 발진한 왕복선들이 화산재를 뚫고 착륙하자 중무장한 광전사들이 신속하게 전개하여 주변을 통제했다. 집행관은 직접 지상으로 내려와 태사다르와 감격적인 재회를 나누었다. 고향이 불타고 있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존경하는 전임자와의 만남은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곧 깨어지고 말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스며 나오듯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바로 제라툴과 암흑 기사단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복면으로 가려져 있었고 신경삭이 잘려 나간 머리칼은 대의회의 율법에 묘사된 이단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제라툴이 변형 차원 검을 갈무리하며 조용히 앞으로 나서자 현장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광전사들은 조건반사적으로 사이오닉 검을 점화하며 암흑 기사단을 향해 맹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네라짐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와 두려움이 칼라를 통해 병사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이 벌어질 것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집행관 역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칼라의 빛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자들. 공허의 어두운 힘을 다루며 프로토스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타락한 이단자들. 그것이 집행관과 칼라이 프로토스들이 평생토록 세뇌받아 온 암흑 기사단에 대한 인식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제라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굳건했던 신념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라툴은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시선들 앞에서도 조금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칼라의 공명을 거치지 않은 낮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어 초월체의 진정한 기원과 저그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는 기만이나 적의도 없었으며 오직 종족의 파멸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태사다르가 집행관과 제라툴 사이로 나서며 양측의 충돌을 만류했다. 그는 제라툴이 자스를 암살하며 보여준 용기와 헌신을 증언하며 암흑 기사단이야말로 아이어를 구원할 유일한 열쇠라고 역설했다. 태사다르는 자신의 모든 명예와 목숨을 걸고 제라툴의 충성심을 보증하겠다고 선언했고 결연한 눈빛은 의심을 허물기 시작했다.
집행관의 뇌리에는 대의회와 알다리스가 내린 태사다르 체포 명령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명령을 수행한다면 영웅과 암흑 기사단을 적대해야 했고 거부한다면 자신 역시 반역자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안티오크에서 겪었던 부활하는 정신체의 악몽을 떠올리자 공허의 힘만이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내 집행관은 무기를 거두고 호위병들에게도 경계를 풀 것을 지시했다. 대의회의 맹목적인 교리보다 눈앞의 진실과 동족의 생존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제라툴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과거의 적의를 묻어두고 하나 된 프로토스로서 저그에 맞서 싸울 것을 제안하며 새로운 연대의 싹을 틔웠다.
과거의 원한을 넘어선 구출 작전
![🎨 [AI 복원 일러스트] 차 행성에서 탈출하기 위해 저그에 맞서 병합 전투를 벌이는 칼라이 광전사와 네라짐 암흑 기사단.](/assets/resized/480/guides/starcraft-novel-009-section-07-20261008.webp)
집행관의 결단으로 내전의 위기는 넘겼지만 저그 군단은 그들이 여유를 부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대규모 병력이 착륙한 것을 감지한 차 행성의 저그 무리가 사방에서 땅을 뚫고 솟아오르며 구출 부대를 포위해 들어왔다. 거대한 땅굴벌레들이 끔찍한 울음소리를 내며 병력을 토해냈고 집행관은 즉시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칼라이 광전사들과 암흑 기사단이 수천 년의 반목을 뛰어넘어 서로의 등을 맞대고 저그 무리를 향해 돌진한 것이다. 푸른 사이오닉 검과 녹색의 변형 차원 검이 교차하며 춤을 추었고 상반된 에너지는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적들을 도륙했다. 진정한 힘은 분열이 아닌 통합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제라툴과 암흑 기사단의 전투 방식은 칼라이 전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들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소리 없이 적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어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육중한 울트라리스크조차 그들의 날카로운 검격 한 번에 급소를 찔려 쓰러졌다. 암흑 기사단의 우아한 움직임은 퇴각하는 아군의 후방을 엄호했다.
레이너의 특공대 역시 구출 작전에 큰 힘을 보탰다. 공성 전차들이 언덕 위에서 포신을 전개하고 막강한 화력을 쏟아부어 저그의 밀집 대형을 분쇄했고 해병들은 쉴 새 없이 가우스 소총을 난사하며 왕복선 주변의 안전지대를 확보했다. 종족과 이념을 초월한 완벽한 호흡 덕분에 생존자들은 치명적인 피해 없이 탑승할 수 있었다.
마지막 왕복선의 출입문이 닫히고 엔진이 굉음을 내며 불을 뿜었다. 거대한 함선들이 화산재 구름을 뚫고 궤도를 향해 솟구쳐 오르는 동안 지상에서는 수천 마리의 뮤탈리스크들이 뒤를 쫓아왔지만 호위 정찰기들의 맹렬한 요격에 막혀 추격을 포기해야만 했다. 집행관은 함교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표정은 이내 굳어졌다.
태사다르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차 행성의 붉은 표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끝났지만 진정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향 아이어는 여전히 초월체의 끔찍한 지배 아래 고통받고 있었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의회의 맹목적인 분노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제라툴 역시 태사다르의 곁으로 다가와 침묵 속에서 우주를 응시했다. 두 영웅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무거운 짐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원한과 오해를 모두 공허 속에 묻어버리고 오직 프로토스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고향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집행관은 굳건한 뒷모습을 보며 결코 희망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함대의 모든 함선이 차 행성의 중력권을 벗어나 차원 도약 준비를 마쳤다. 집행관의 짧고 단호한 명령과 함께 거대한 우주 공간이 일그러지며 푸른빛의 차원 균열이 열렸다. 프로토스와 테란 그리고 암흑 기사단을 태운 함대는 끔찍한 지옥을 뒤로한 채 상처 입은 고향 아이어를 향해 빛의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이어의 상처와 깊어지는 분열
![🎨 [AI 복원 일러스트] 우주선 함교에서 상처 입은 아이어 행성과 알다리스의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는 태사다르와 제라툴.](/assets/resized/480/guides/starcraft-novel-009-section-08-20261008.webp)
차원 도약의 푸른 섬광이 걷히고 사령선의 관측창 너머로 아이어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함교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한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에메랄드빛 행성은 이제 끔찍한 점막으로 뒤덮여 썩어가는 시체처럼 변해 있었다. 대기권 곳곳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신성한 사원들은 무너져 내렸다.
태사다르와 제라툴은 홀로그램 탁자 위에 투영된 아이어의 참상을 보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초월체는 이미 행성의 지각 깊숙한 곳까지 촉수를 뻗어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막대한 수의 저그 군단이 겹겹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저 거대한 악의 덩어리를 당장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집행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저그의 압도적인 위용이 아니었다. 그는 다가올 전투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적이 아닌 바로 자신들의 지도부인 대의회가 될 것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암흑 기사단을 대동하고 돌아온 태사다르를 대의회가 순순히 환영할 리 만무했고 이는 곧 내전의 시작을 의미했다.
집행관의 우려는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함대의 통신망을 뚫고 심판관 알다리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알다리스는 태사다르가 이단자들과 결탁하여 아이어의 신성한 영토를 더럽히려 한다며 즉각적인 무장 해제와 항복을 강요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저그에 대한 분노보다 교리를 어긴 자들에 대한 증오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태사다르는 차분한 목소리로 알다리스에게 통신을 연결하여 진실을 호소하려 했다. 그는 제라툴의 공허 에너지만이 초월체와 정신체를 영구히 파괴할 수 있으며 지금은 이념의 차이를 접고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간곡히 설득했다. 그러나 알다리스는 태사다르의 말을 타락한 자의 궤변으로 치부하며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버렸다.
가장 위대한 적을 눈앞에 두고도 내부의 이념 갈등으로 인해 칼을 맞대야 하는 프로토스의 비극적인 현실은 함교의 모든 이들을 깊은 슬픔에 빠뜨렸다. 짐 레이너조차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혀를 차며 프로토스 지도부의 꽉 막힌 고집을 비난했다. 종족을 구원할 유일한 희망을 손에 쥐고도 스스로 꺾어버리려는 대의회의 맹목성은 치명적이었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피닉스의 용기병이 둔탁한 금속음을 내며 앞으로 나섰다. 기계 장치 속에 갇힌 그의 차가운 육신은 이 끔찍한 전쟁이 프로토스에게 남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대변하고 있었다. 피닉스는 칼라를 통해 집행관과 태사다르에게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내며 대의회의 낡은 율법보다 동족의 생존이 우선이라는 신념을 전했다.
집행관은 결연한 눈빛으로 전 함대에 전투태세를 지시했다. 그들은 이제 끔찍한 외계 괴물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반역자로 규정한 동족의 함대와도 동시에 맞서 싸워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초월체는 아직 아이어의 심장부에서 끔찍한 고동을 멈추지 않고 있었고 사령선이 대기권을 돌파하며 피할 수 없는 내전의 소용돌이로 진입했다.
댓글 1
피닉스가 용기병이 되는 과정은 언제 봐도 마음이 아프네요. 그래도 그 굳건한 정신은 기계 몸 안에서도 여전해서 다행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