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 연대기 23화 · 유리 너머에서 깨어난 사라
이 글의 목차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우모자의 연구소에서 시험받는 케리건

우모자 보호령의 비밀 연구소 깊은 곳, 사방이 눈부신 백색으로 칠해진 격리실 한가운데에 사라 케리건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관자놀이와 척추를 따라 차가운 신경 연결 단자들이 붙어 미세한 전류를 흘려보냈다. 인간의 피부를 되찾았음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이질적인 감각이 소음처럼 맴돌았다. 유리 너머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연구원들의 시선은 위험한 맹수를 구경하는 듯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스피커를 타고 건조한 기계음이 격리실 내부를 울렸다. 연구진은 그녀에게 중앙에 놓인 육중한 금속 상자를 염력으로 들어 올리라고 지시했다. 케리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과거 칼날 여왕 시절에는 숨을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뇌혈관이 터질 듯한 압박감이 먼저 밀려왔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호흡이 점차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억눌린 사이오닉 에너지가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금속 상자를 바닥에서 서서히 띄워 올렸다. 허공에 뜬 상자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케리건의 콧등에서는 붉은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상자를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치자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바닥의 타일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사이오닉 등급 측정 완료,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감정 없는 연구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케리건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그녀는 머리에 붙은 신경 단자들을 거칠게 뜯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부가 긁혀 피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실험 쥐 취급하는 이 철저히 통제된 환경에 갇혀 있는 매 순간이 끔찍한 고문처럼 느껴졌다.
케리건은 두꺼운 방탄유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유리 너머의 연구원들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들은 그녀가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과거의 학살자를 대하듯 공포에 질려 있었다. 케리건은 유리에 손을 짚고 자신의 창백한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귓가에는 아직도 저그 군단의 미세한 속삭임이 환청처럼 맴돌고 있었다. 수십억의 생명체가 오직 자신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우주를 뒤덮던 그 끔찍하고도 강렬한 연결감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젤나가 유물이 그녀의 외형을 인간으로 되돌려 놓았지만,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군단의 흔적까지 완벽하게 지워내지는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케리건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귓가를 맴도는 속삭임을 억눌렀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군단의 지배력이 아니라, 이 지긋지긋한 과거에서 벗어나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연구소의 차가운 공기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험은 그녀가 결코 평범해질 수 없다는 현실을 매일같이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차가운 의자에 주저앉았다.
격리실의 조명이 약간 어두워지며 휴식 시간이 주어졌음을 알렸다. 케리건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질렀던 과거의 학살들을 떠올렸다. 수많은 행성이 불타고 무고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던 환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인간으로서의 죄책감이 매일 밤 그녀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발레리안의 경계와 통제받는 삶에 대한 불안

관측실 위층에서 발레리안 멩스크가 팔짱을 낀 채 케리건의 일거수일투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아버지를 닮아 차갑고 계산적이었지만, 동시에 미지의 과학적 발견을 향한 강렬한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젤나가 유물이 어떻게 저그의 변이를 되돌렸는지, 그리고 케리건에게 남은 사이오닉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수치화하여 기록하기를 원했다.
황태자님,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위험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오늘 실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석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데이터를 내밀며 말했다. 발레리안은 모니터에 떠오른 복잡한 뇌파 그래프를 잠시 응시하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의 한계점이 어디인지 명확히 알아야 하네, 유물의 부작용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일 아닌가, 계속 진행해.
마이크를 켠 발레리안이 부드럽지만 강압적인 목소리로 격리실에 방송을 내보냈다. 사라, 당신이 겪는 고통은 유감이지만 이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오, 당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우리가 당신을 도울 수 있소. 그 위선적인 위로의 말은 케리건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리를 뚫어질 듯 노려보며 살기를 뿜어냈다.
인류의 미래 같은 소리 집어치워 꼬마 멩스크, 넌 그저 네 아버지처럼 나를 무기로 쓸 수 있을지 재고 있는 것뿐이잖아. 케리건의 날카로운 외침이 스피커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자 격리실 내부의 조명들이 불안정하게 깜빡거리며 파열음을 냈다. 관측실의 연구원들은 기겁하며 보호막 제어 장치로 달려갔고, 발레리안만이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주시했다.
당신은 아직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소, 그 힘이 다시 당신을 괴물로 만들기 전에 우리가 통제권을 쥐어야만 하오. 발레리안의 차분한 대답은 논리적이었지만, 케리건에게는 그저 감옥의 간수가 늘어놓는 변명으로 들렸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멩스크라는 이름표를 단 자들은 언제나 그녀의 삶을 짓밟고 통제하려 들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케리건은 좁은 격리실 안을 짐승처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싼 두꺼운 장갑판과 감시 카메라는 그녀의 숨을 막히게 했다. 그녀는 자신이 칼날 여왕 시절 누렸던 무한한 자유와 우주를 호령하던 권력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 억압적인 환경은 자꾸만 그녀의 어두운 본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통제받는 삶에 대한 극심한 불안감이 그녀의 심장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연구원들이 다음 실험을 위해 기계 팔을 조작하여 새로운 목표물을 격리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무장한 전투 로봇이 붉은 렌즈를 번뜩이며 케리건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이 무의미한 전투력 측정에 구역질을 느꼈다. 분노가 사이오닉 에너지로 변환되어 그녀의 두 손에 푸른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녀는 로봇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을 뻗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로봇의 장갑을 찌그러뜨렸다.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로봇은 단숨에 고철 덩어리로 변해 바닥에 뒹굴었다. 케리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레리안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이게 네가 원하던 데이터야, 더 이상 나를 시험하려 들면 다음엔 저 로봇 대신 네 목을 비틀어버리겠어. 그녀의 서늘한 경고에 발레리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껐다. 긴장감이 연구소를 무겁게 짓눌렀다.
레이너와의 재회 그리고 인간으로 살 미래

격리실의 무거운 금속 문이 거친 기계음과 함께 강제로 열렸다. 무장한 경비병들이 제지하려 했지만, 짐 레이너는 그들을 거칠게 밀쳐내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낡은 가죽 재킷에는 흙먼지와 기름 냄새가 배어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지만 두 눈만은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레이너는 유리를 사이에 두고 발레리안을 향해 권총을 빼들 듯 손가락을 겨누며 경고했다.
내 말 똑똑히 들어 주니어, 이 여자는 네 실험실의 쥐새끼가 아니야, 당장 이 망할 기계들을 끄고 문을 열어. 레이너의 분노 어린 외침에 연구원들은 겁에 질려 발레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발레리안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여 구속 장치를 해제할 것을 지시했다. 차단벽이 서서히 내려가고, 케리건을 가두고 있던 투명한 감옥의 문이 마침내 열렸다.
케리건은 비틀거리며 격리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찰나, 레이너가 다가와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 그의 넓은 가슴과 익숙한 체취가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단숨에 녹여내렸다. 케리건은 레이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오랫동안 참아왔던 숨을 토해냈다.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끔찍했던 연구소의 공포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짐, 당신이 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어. 케리건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자, 레이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내가 널 두고 어딜 가겠어 사라, 늦어서 미안해, 이제 다 끝났어, 우린 여기서 나갈 거야. 그의 굳은 약속은 그녀에게 무엇보다 강력한 구원처럼 들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위안을 찾았다.
하지만 케리건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무거운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레이너의 품에서 살짝 벗어나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저지른 짓들을 잊을 수가 없어, 내 손에 묻은 수십억 명의 피가 매일 밤 나를 괴롭혀, 내가 정말 다시 인간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는 걸까. 그녀의 눈동자에는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깊은 절망과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다.
레이너는 그녀의 두 손을 꽉 쥐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한 짓이 아니야, 멩스크가 널 괴물로 만들었고 저그가 널 조종한 것뿐이야, 진짜 사라 케리건은 지금 내 눈앞에 있어. 그의 진심 어린 위로는 그녀의 상처 난 영혼에 스며들었다. 레이너는 그녀가 짊어진 끔찍한 과거의 무게를 기꺼이 함께 나누어지겠다는 굳은 의지를 두 눈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가자, 멩스크도 저그도 프로토스도 없는 변방의 조용한 행성으로,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레이너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미래를 이야기하자, 케리건의 얼굴에도 옅은 희망의 빛이 스쳤다. 평범한 집을 짓고, 매일 아침 함께 눈을 뜨며 조용한 일상을 보내는 삶. 그것은 칼날 여왕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너무나도 눈부신 꿈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다가올 평화로운 미래를 머릿속에 그렸다. 과거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겠지만, 함께라면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연구소의 차가운 조명 아래서 그들이 나누는 짧은 평화는 그 어떤 전투의 승리보다 값진 것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가혹한 운명은 그들에게 허락된 이 작은 행복조차 오래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자치령 병력의 급습과 무너지는 연구소

갑자기 연구소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평화롭던 공기가 산산조각 나고, 눈부신 백색 조명이 일제히 꺼지며 핏빛 붉은 비상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귀를 찢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레이너는 본능적으로 케리건을 등 뒤로 숨기며 허리춤에서 가우스 권총을 빼들었다. 발레리안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통신 콘솔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우모자 방어선이 뚫렸다고. 발레리안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스피커 너머로는 병사들의 비명과 총성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케리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예민한 사이오닉 감각이 연구소 외곽에서부터 밀려오는 수많은 인간들의 적대적인 파장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 익숙하고도 끔찍한 살기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아크튜러스 멩스크의 자치령 부대였다.
아버지가 우릴 찾아냈어, 노바의 유령 요원들이 선발대로 진입 중이다. 발레리안이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자치령의 정예 부대가 이 외딴 우모자 시설까지 추적해 온 것이다. 레이너는 이를 꽉 깨물고 총기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망할 멩스크 영감탱이 포기를 모르는군, 사라 당장 움직여야 해, 여긴 곧 벌집이 될 거야. 그는 케리건의 손을 잡고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연구소의 두꺼운 방폭문이 폭약에 의해 종잇장처럼 뜯겨 나갔다. 검은 전투복을 입은 자치령 해병들이 연막을 뚫고 쏟아져 들어오며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붉은 궤적을 그리는 가우스 소총탄이 연구소의 정밀한 기기들을 박살 내고 파편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레이너는 엄폐물 뒤로 몸을 던지며 정확한 사격으로 선두에 선 해병 두 명의 헬멧을 꿰뚫어 쓰러뜨렸다.
타겟 확인, 사라 케리건이다, 생포할 필요 없다 즉시 사살하라. 해병대장의 잔인한 명령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멩스크는 애초에 그녀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케리건의 눈동자가 분노로 푸르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엄폐물에서 반쯤 몸을 내밀고 손을 뻗어 강력한 사이오닉 충격파를 방출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해병들의 진형을 덮쳤다.
충격파를 정통으로 맞은 해병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공중으로 붕 떠올라 벽에 처박혔다. 육중한 전투복이 찌그러지고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케리건은 코피를 흘리며 비틀거렸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맹수처럼 매서웠다. 레이너는 그녀가 다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생존이 최우선이었다. 그는 쓰러진 적들을 넘어 앞으로 돌격했다.
연구소 내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우모자 경비병들이 자치령 부대에 맞서 응사했지만, 수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독성 연기가 복도를 채우기 시작했다. 발레리안은 남은 연구원들을 이끌고 비상 탈출구로 향했고, 레이너와 케리건은 그들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빗발치는 총탄 속을 뚫고 적들의 측면을 타격했다.
이쪽이야, 하층부의 화물 트램을 타면 우주공항까지 갈 수 있어. 레이너가 복도 끝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치령의 드랍쉽이 창밖으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고, 더 많은 병력이 강하하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포위망은 더욱 좁혀질 것이 분명했다. 케리건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레이너의 뒤를 바짝 쫓았다. 두 사람은 무너져 내리는 연구소를 뒤로하고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했다.
서로를 지키며 감행하는 필사적인 탈출

매캐한 연기와 번쩍이는 경고등 속에서 케리건과 레이너는 환상의 호흡으로 적들을 돌파해 나갔다. 레이너가 앞장서서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리볼버 권총으로 적의 시야를 교란하면, 케리건이 사이오닉 에너지로 엄폐물을 부수거나 해병들의 무기를 고장 냈다. 과거 차 행성에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두 사람은 이제 서로의 등 뒤를 지키는 가장 든든한 전우가 되어 사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자치령 불곰 두 기가 거대한 유탄 발사기를 겨누고 길을 막아섰다. 조심해. 레이너가 케리건을 밀쳐내며 바닥을 굴렀다. 묵직한 유탄이 그들이 있던 자리에 떨어져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충격파에 휩쓸린 레이너가 벽에 부딪혀 신음을 흘리자, 케리건의 이성이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두 손으로 강력한 염력을 끌어모았다.
케리건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불곰들의 육중한 장갑복을 감쌌다. 그녀가 두 손을 교차하며 강하게 쥐어짜자, 튼튼한 네오스틸 장갑이 끔찍한 금속음을 내며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내부의 병사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고, 유탄 발사기가 오작동을 일으키며 스스로 폭발했다. 화염에 휩싸인 불곰들이 쓰러지자 케리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었다.
사라 무리하지 마. 레이너가 다급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부축했다. 인간의 몸으로 한계 이상의 사이오닉 에너지를 연속해서 사용하는 것은 그녀의 신경계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었다. 케리건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괜찮아 짐, 당신이 다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를 향한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화물 트램이 있는 하층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에서는 끊임없이 자치령 해병들의 군화 발소리가 추격해 오고 있었다. 레이너는 탄창을 교체하며 케리건의 창백한 얼굴을 살폈다.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과거의 끔찍한 힘을 다시 꺼내 드는 모습이 그를 가슴 아프게 했다. 그는 속으로 멩스크를 향한 분노를 삭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좁은 통로를 지나 거대한 화물 구역에 들어서자, 천장의 캣워크에서 매복하고 있던 유령 요원들이 저격총을 겨누는 것이 보였다. 붉은 레이저 포인터가 레이너의 가슴팍을 향해 춤을 추듯 다가왔다. 케리건은 본능적으로 레이너 앞을 막아서며 사이오닉 방어막을 전개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저격탄이 방어막에 부딪혀 튕겨 나갔고, 케리건은 충격으로 뒤로 밀려났다.
이 비겁한 새끼들. 레이너가 분노하며 캣워크를 향해 권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조명탑을 맞추고 떨어지며 유령 요원들의 시야를 가렸다. 그 틈을 타 케리건이 염력으로 캣워크의 지지대를 뜯어내 버렸다. 철제 구조물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고, 유령 요원들은 비명과 함께 화물 더미 위로 추락했다.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며 잠시나마 적들의 추격을 지연시켰다.
잘했어 사라, 트램 승강장이 코앞이야 조금만 더 버텨. 레이너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환호하며 케리건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사람의 손바닥 사이로 뜨거운 땀방울이 배어 나왔지만, 그들은 결코 손을 놓지 않았다.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혼란 속의 분리와 끊어진 연락

트램 승강장에 도착한 두 사람의 눈앞에 거대한 금속제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 너머에는 우주공항으로 이어지는 구명정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기야, 저것만 타면 빠져나갈 수 있어. 레이너가 희망에 찬 목소리로 외치며 다리 위로 뛰어올랐다. 케리건도 그의 뒤를 따르려던 순간, 승강장 천장을 뚫고 자치령의 중장갑 강습기가 굉음을 내며 난입해 미사일을 발사했다.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다리 중앙이 산산조각 나며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불길이 치솟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케리건은 폭발의 충격파에 밀려 다리 입구 쪽으로 튕겨 나갔고, 레이너는 가까스로 다리 건너편에 매달려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시뻘건 화염과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낭떠러지가 가로놓이게 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끔찍한 분리였다.
짐. 케리건이 절망적인 비명을 지르며 끊어진 다리 끝으로 기어갔다. 불길 너머로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레이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허공으로 몸을 던져 그를 구하고 싶었지만, 사이오닉 에너지는 이미 바닥난 상태였고 물리적인 거리는 너무 멀었다. 뒤에서는 자치령 해병들이 승강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레이너는 턱걸이하듯 간신히 다리 위로 기어 올라가며 숨을 헐떡였다. 그는 건너편에서 울부짖는 케리건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사라, 날 기다리지 말고 당장 떠나, 구명정을 타고 먼저 가. 그의 목소리는 폭발음과 총성에 묻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그 안에 담긴 결연한 의지만은 뚜렷하게 전해졌다. 하지만 케리건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
안 돼, 당신을 두고 갈 순 없어, 다시는 당신을 잃지 않을 거야. 케리건이 오열하며 끊어진 철골을 붙잡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과거 타소니스에서 자신을 버려두고 떠났던 멩스크의 함대가 떠올랐다. 그때의 끔찍한 고립감과 배신감이 다시금 그녀의 심장을 조여왔다. 이번에는 자신이 레이너를 버려두고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말 들어 사라, 우린 히페리온에서 다시 만날 거야 약속할게 제발 가. 레이너가 권총을 뽑아 들고 다가오는 자치령 병사들을 향해 사격을 가하며 절규했다. 승강장의 비상 차단벽이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차단벽이 완전히 닫히면 두 사람은 영원히 서로를 볼 수 없게 될 터였다. 레이너의 굳건한 눈빛이 그녀에게 살아남으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두꺼운 차단벽이 완전히 바닥에 닿으며 두 사람 사이의 시야를 잔인하게 차단했다. 케리건은 차가운 금속 벽에 주먹을 내리치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녀는 급히 손목의 통신기를 켜고 레이너의 주파수를 맞췄다. 짐 대답해 짐. 그녀의 애타는 부름이 무색하게도, 통신기에서는 소름 끼치는 백색소음만이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올 뿐이었다.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 차단벽 너머에서 레이너가 무사한지, 아니면 자치령의 총탄에 쓰러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남은 우모자 경비병들이 넋을 잃은 케리건의 팔을 이끌고 억지로 구명정에 밀어 넣었다. 구명정의 문이 닫히고 엔진이 점화되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통신기를 쥔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차가운 우주로 튕겨 나가는 구명정 안에서 그녀는 완벽한 혼자가 되었다.
거짓으로 꾸며진 자치령의 처형 발표

우모자 시설을 빠져나온 구명정은 칠흑 같은 우주 공간을 미끄러지듯 날아가고 있었다. 비좁고 차가운 선실 내부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케리건은 구석에 웅크려 앉아 피 묻은 자신의 두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통신기는 여전히 아무런 신호도 잡지 못하고 먹통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직 레이너가 무사히 탈출하여 약속 장소로 오고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기도뿐이었다.
갑자기 선실 내부의 모니터가 지지직거리며 켜지더니, 강제로 주파수가 고정되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자치령의 공식 뉴스 채널인 UNN의 로고였다. 케리건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내 화면이 전환되고, 화려한 황궁을 배경으로 선 아크튜러스 멩스크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오만하고도 비열한 미소가 가득 번져 있었다.
자치령의 위대한 시민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께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멩스크의 기름진 목소리가 선실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케리건은 숨을 죽이고 모니터로 다가갔다. 화면 하단에는 반란군 수괴 제임스 레이너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다라는 자극적인 자막이 붉은색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 문구를 읽는 순간 케리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수년간 자치령의 평화를 위협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 제임스 레이너가, 오늘 우리 자랑스러운 자치령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멩스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극적인 효과를 노리듯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케리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났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것만은 안 돼.
그의 끔찍한 범죄 행위에 대한 심판은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임스 레이너는 법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 방금 전 처형되었습니다, 이제 반란군의 위협은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멩스크의 단호한 선언이 선실을 울렸다. 화면에는 레이너의 시신이나 처형 장면 대신, 그의 상징과도 같은 낡은 권총과 훈장이 짓밟힌 채 나뒹구는 상징적인 자료 화면만이 재생되고 있었다.
케리건은 모니터 앞에 굳어버린 채 서 있었다. 멩스크의 입에서 나온 처형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뇌리를 망치처럼 강타했다. 거짓말이야, 멩스크의 뻔한 선전선동일 뿐이야. 그녀는 속으로 수백 번 부정했지만, 차단벽 너머로 혼자 남겨졌던 레이너의 마지막 모습과 끊어진 통신이 그녀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명확한 시신을 보지 못했음에도 정황은 그녀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화면 속 멩스크는 여유롭게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자치령의 영원한 영광을 축원하고 있었다. 그 비열한 얼굴을 보는 순간, 케리건의 핏속에서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모니터에 손을 뻗었다가 이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레이너가 죽었다. 자신을 인간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유일한 구원자가 사라진 것이다.
방송이 끝나고 모니터가 다시 검게 꺼지자, 선실에는 끔찍한 침묵만이 남았다. 케리건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다. 그녀는 레이너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멩스크의 거짓 발표는 그녀의 마음에 한 치의 의심도 남기지 못한 채 그녀의 세계를 완벽하게 붕괴시켰다.
절망 속에서 군단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히다

슬픔은 이내 통제할 수 없는 분노로 변모했다. 케리건의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차갑게 말라붙었고, 그녀의 눈동자는 과거 칼날 여왕 시절처럼 서늘한 호박색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사이오닉 에너지가 선실 내부를 휩쓸며 조명과 모니터들을 일제히 박살 냈다. 파편들이 허공을 맴돌았다.
아크튜러스, 네놈이 감히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가. 케리건의 목소리는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나도 낮고 섬뜩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녀는 인간성이라는 얄팍한 껍데기가 자신에게 얼마나 무력하고 비참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평범한 삶을 꿈꾸었던 그녀의 헛된 희망이 레이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멩스크를 죽이기 전까지 그녀에게 안식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녀는 파괴된 콘솔을 거칠게 조작하여 구명정의 항법 장치를 수동으로 전환했다. 목적지를 설정하는 그녀의 손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멩스크의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의 목줄을 죄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다. 몇 명의 반란군이나 용병 따위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우주를 불태울 수 있는 오직 그녀만을 따르는 무자비한 괴물들이 필요했다.
케리건이 눈을 감고 정신을 우주 너머로 확장하자,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저그 군단의 속삭임이 밀물처럼 그녀의 의식을 채우기 시작했다. 여왕을 잃고 흩어져 방황하던 수억 마리의 저그들이 그녀의 희미한 사이오닉 파장을 감지하고 환희에 찬 울부짖음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것은 끔찍하고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목소리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다려라 나의 군단아, 너희의 여왕이 돌아간다. 케리건이 어둠 속을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결의는 단단한 강철과도 같았다. 비록 몸은 연약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미 복수에 굶주린 칼날 여왕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레이너가 목숨을 바쳐 되찾아준 인간성을 스스로 내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멩스크를 파멸시키겠다고 맹세했다.
구명정의 엔진이 굉음을 내며 방향을 틀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자치령의 안전한 항구가 아니라, 흉포한 저그들이 우글거리는 미지의 심우주였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별빛들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차갑게 비추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오직 레이너를 잃은 뼈아픈 상실감과, 멩스크를 향한 맹렬한 살의만이 불타고 있었다. 다른 모든 감정은 사치일 뿐이었다.
그녀는 손목에 남아 있던 우모자 연구소의 식별 팔찌를 거칠게 뜯어내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것은 통제받던 인간 사라 케리건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이제 그녀는 누군가의 실험체도,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여자도 아니었다. 우주의 재앙이자 멩스크의 가장 끔찍한 악몽이 다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복수의 톱니바퀴가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구명정이 워프 도약을 위해 차원문을 열며 강렬한 섬광을 뿜어냈다. 케리건은 조종석에 꼿꼿이 앉아 다가올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머릿속에 그렸다. 아직 원시 저그의 힘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의지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잔혹했다. 유리 너머의 통제된 세계에서 깨어난 그녀는, 이제 온 우주를 자신의 분노로 물들일 준비를 마친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댓글 1
케리건의 복수극이 이렇게 시작되는군요. 레이너를 잃었다는 오해 때문에 다시 군단의 여왕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참 안타깝고도 강렬하게 느껴져요. 멩스크의 거짓말이 정말 밉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