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 연대기 11화 · 피난민이 지나간 샤쿠라스의 문
이 글의 목차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초월체 사후에도 저그 무리가 남아 있는 아이어의 절망

아이어의 하늘은 태사다르의 희생이 남긴 섬광으로 여전히 멍들어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대지는 이제 잿빛 먼지와 검붉은 점막으로 뒤덮여 흉측한 상흔을 드러냈다. 초월체의 거대한 잔해 주변으로는 쉴 새 없이 타오르는 불길이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며 프로토스의 몰락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르타니스는 부서진 사원의 잔해 위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폐허를 내려다보았다. 젊은 집행관의 어깨는 제국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무거운 죄책감으로 짓눌려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동족들의 시신과 흉측하게 찢긴 기계 파편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참혹한 광경을 연출했다.
초월체는 파괴되었으나 그것이 저그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통제력을 잃은 야생의 저그 무리는 오히려 더 흉포해진 채로 아이어 전역을 휩쓸며 닥치는 대로 파괴를 일삼았다. 굶주린 짐승처럼 울부짖는 그들의 끔찍한 소음이 칼라의 연결망을 타고 생존자들의 정신을 찢어놓았다.
우리는 승리했으나 모든 것을 잃었소. 아르타니스가 곁에 다가온 그림자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그의 음성에는 억누를 수 없는 비통함이 배어 있었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영광스러운 제국이 단 며칠 만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현실을 그는 아직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제라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흑 기사단의 정무관인 그는 이 비극적인 결말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으나 막상 눈앞에 펼쳐진 고향의 참상은 그의 오랜 심장마저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낡은 망토를 여미며 붉게 물든 지평선을 응시했다.
태사다르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는 없소 집행관. 제라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한 힘이 실려 있었다. 아이어는 이미 죽어가고 있소. 남은 자들마저 이 저주받은 땅에서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오.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만 하오.
아르타니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칼라를 통해 전해지는 생존자들의 공포와 절망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대고 있었다. 저그의 포위망은 시시각각 좁혀오고 있었고 방어선은 이미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더 이상 이 행성에서 버티는 것은 무의미한 자살 행위에 불과했다.
어디로 간단 말이오 우리의 고향은 오직 이곳뿐인데. 아르타니스의 절망적인 물음에 제라툴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났다. 나의 동족들이 머무는 곳 샤쿠라스. 그곳의 차원 관문을 열어 생존자들을 대피시켜야만 하오.
아르타니스와 제라툴이 살아남은 프로토스를 모아 피난 준비

샤쿠라스라는 이름이 나오자 아르타니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천여 년 전 아이어에서 추방당한 암흑 기사단의 은신처로 향한다는 것은 칼라이 프로토스에게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랜 교리와 자존심을 내세울 만큼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대관문이 아직 온전한지 확인해야 하오. 제라툴이 몸을 돌려 폐허가 된 도시의 외곽을 가리켰다. 저그가 그곳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에 생존자들을 결집시켜야만 하오. 시간이 지체될수록 우리가 살릴 수 있는 동족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것이오.
아르타니스는 결연한 의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칼라의 연결망을 통해 긴급한 파동을 내보냈다. 흩어져 있던 프로토스 전사들과 피난민들이 집행관의 부름에 응답하며 조심스럽게 은신처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두려움이 짙게 배어 있었으나 살고자 하는 의지는 뚜렷했다.
생존자들의 행렬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부상당한 광전사들이 서로를 부축하고 어린아이와 노약자들이 공포에 질린 채 전사들의 뒤를 따랐다. 아르타니스는 그들의 참혹한 몰골을 보며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이들을 이끌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다.
제라툴은 암흑 기사들을 이끌고 피난 행렬의 선두에 서서 길을 개척했다. 그의 사이오닉 검이 어둠 속에서 번뜩일 때마다 매복해 있던 저그 무리가 소리 없이 쓰러졌다. 암흑 기사단의 은밀하고 치명적인 전투 방식은 혼란에 빠진 피난민들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마침내 거대한 고대의 구조물 대관문이 그들의 눈앞에 위용을 드러냈다. 다행히 관문 자체는 파괴되지 않았으나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저그 무리가 진을 치고 있었다. 아르타니스는 검을 뽑아 들며 전사들에게 진형을 갖출 것을 명령했다. 탈출을 위한 마지막 혈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관문을 활성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오. 제라툴이 관문의 제어 장치로 다가가며 외쳤다. 고대의 에너지를 깨우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고 그동안 누군가는 저그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야만 했다. 아르타니스는 선두로 나서며 쏟아져 나오는 저글링 떼를 향해 돌진했다.
피난민들은 관문 주변으로 둥글게 모여 공포에 떨며 기도했다. 전사들의 함성과 저그의 괴성이 뒤섞여 끔찍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관문의 중심부에서 서서히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하자 생존자들의 눈에 가느다란 희망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저그의 공세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레이너와 페닉스가 아이어 쪽 후방을 지키기로 한다

푸른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차원 관문이 마침내 열렸다. 아르타니스는 피난민들에게 서둘러 관문 안으로 뛰어들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저그의 무리는 끝이 없었고 방어선은 점점 뒤로 밀려나며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누군가 후방에 남아 이들을 저지하지 않으면 모두가 몰살당할 판이었다.
그때 육중한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용기병 하나가 방어선의 최전방으로 나섰다. 피닉스였다. 그의 기계 동체는 이미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아 그을려 있었지만 그의 기백만큼은 아이어의 어떤 전사보다도 맹렬했다. 내가 남겠네 아르타니스 자네는 동족들을 이끌고 어서 떠나게.
피닉스 그럴 순 없소 당신을 또다시 잃을 수는 없단 말이오. 아르타니스가 다급하게 외치며 그를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피닉스는 단호한 동작으로 반물질 포를 발사해 다가오는 히드라리스크들을 산산조각 냈다. 그의 기계 음성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묻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선택이자 기사단의 영광이네. 누군가는 이 저주받은 짐승들의 발목을 잡아야 하지 않겠나. 피닉스의 곁으로 익숙한 엔진 굉음을 내며 테란의 시체매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짐 레이너였다. 그는 헬멧의 바이저를 올리며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와 내 부하들도 여기 남겠소 집행관. 레이너가 통신기를 통해 말했다. 우리가 빠지면 이 덩치 큰 친구가 혼자서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 말이지. 게다가 우린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그의 뒤로 테란 해병들과 공성 전차들이 속속 도착해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아르타니스는 두 영웅의 숭고한 결단 앞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방인인 테란마저 프로토스의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다. 제라툴이 다가와 아르타니스의 어깨를 무겁게 짚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되오. 우리는 살아서 미래를 도모해야만 하오.
엔 타로 태사다르 엔 타로 아둔. 아르타니스는 피닉스와 레이너를 향해 깊은 존경을 담아 경례했다. 피닉스 역시 육중한 팔을 들어 답례했고 레이너는 무심한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르타니스는 차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몸을 돌려 차원 관문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관문 너머로 사라지는 프로토스 생존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며 피닉스와 레이너는 무기를 고쳐 쥐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저그의 해일을 마주한 두 지휘관의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결연한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이어에 남겨진 자들의 처절한 방어전이 막을 올렸다.
차원 관문을 지나 낯선 샤쿠라스에 들어서는 난민

차원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아르타니스는 온몸의 감각이 뒤틀리는 듯한 강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시공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짧은 찰나를 지나 그는 거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눈을 뜨자 그를 맞이한 것은 아이어의 따스한 햇살이 아닌 영원한 황혼의 하늘이었다.
샤쿠라스의 공기는 서늘하고 건조했으며 낯선 행성의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태양이 없는 이 행성은 희미하게 빛나는 성운과 기이한 발광 식물들만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뒤이어 관문을 빠져나온 칼라이 피난민들은 낯선 환경에 압도되어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이 암흑 기사단의 고향이란 말이오. 한 고위 기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수천 년 동안 칼라의 따뜻한 빛 속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샤쿠라스의 짙은 어둠은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몇몇 피난민들은 척박한 대지에 주저앉아 고향을 잃은 슬픔에 오열하기 시작했다.
제라툴이 어둠 속에서 미끄러지듯 나타나 불안에 떠는 무리 앞에 섰다. 그의 존재는 이 낯선 세계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이정표와 같았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형제들이여. 샤쿠라스의 어둠은 우리를 숨겨주는 장막일 뿐 결코 해를 끼치지 않소. 나를 따라오시오.
피난민들은 제라툴의 안내를 받으며 험준한 바위 협곡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거센 모래바람이 그들의 낡은 로브를 흩날렸고 피로에 지친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아르타니스는 행렬의 맨 뒤에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며 생존자들을 독려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아이어에 남은 이들에 대한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협곡을 빠져나오자 거대한 지하 도시의 입구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측면에 정교하게 조각된 건축물들은 아이어의 황금빛 사원과는 전혀 다른 차갑고도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수천 년의 유배 생활 동안 네라짐이 이룩한 생존의 증거였다.
도시의 입구에 다다르자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녹색 안광이 번뜩였다. 암흑 기사단의 전사들이 경계 태세를 갖춘 채 낯선 방문객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차원 검이 위협적인 소음을 내며 진동했다. 피난민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공포에 질린 숨을 삼켰다.
제라툴이 양팔을 벌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네라짐의 고유한 언어로 무언가를 외쳤고 경계하던 전사들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 서린 적대감과 경계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수천 년 전 자신들을 쫓아낸 자들을 안방으로 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라짐과 칼라이가 마주하고 오래된 분열을 감당

네라짐 전사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칼라이 무리를 둥글게 포위했다. 그들의 얼굴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칼라이 전사들 역시 본능적으로 사이오닉 검을 점화하려 했고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무기를 거두시오. 아르타니스가 다급하게 외치며 칼라이 전사들의 앞을 막아섰다.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우리는 고향을 잃고 쫓겨난 피난민일 뿐이오. 그의 절박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네라짐 전사들의 무기는 거두어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쌓인 원한의 골은 그토록 깊었다.
한 네라짐 장로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를 이 척박한 땅으로 내몰았던 자들이 이제 와서 우리의 보호를 구한단 말인가. 대의회는 우리를 이단이라 부르며 사냥하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우리가 너희를 거두어야 한단 말이냐.
그 말에 몇몇 칼라이 생존자들이 수치심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들은 반박할 수 없었다. 대의회의 오만함이 결국 아이어의 파멸을 초래했음을 그들 스스로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라툴이 장로의 앞으로 다가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대의회는 무너졌소 모한다르. 아이어는 저그의 발밑에 짓밟혔고 이들은 살아남은 마지막 동족들이오. 태사다르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우리 모두를 구원했소. 그가 보여준 희생은 칼라이와 네라짐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소.
태사다르의 이름이 언급되자 네라짐 전사들 사이에서 미세한 동요가 일었다. 암흑 기사단에게도 태사다르는 그들의 힘을 이해하고 존중해 준 유일한 고위 기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숭고한 죽음은 이 오랜 원한의 벽에 작은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아르타니스는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의 조상들이 저지른 과오를 부정하지 않겠소.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같은 적에게 쫓기고 있는 형제요.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우리의 피로 이 척박한 땅을 더럽히고 싶지 않소.
젊은 집행관의 진심 어린 호소와 제라툴의 보증에 네라짐 전사들의 살기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마침내 장로가 손짓하자 전사들이 무기를 거두고 길을 열었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스르르 풀리며 칼라이 피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진정한 시험은 아직 남아 있었다.
라자갈이 피난민을 받아들이고 공동의 생존을 논의

네라짐 전사들의 인도를 받아 피난민들은 거대한 지하 성채의 중심부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수정들로 장식된 넓은 광장이 있었고 광장 중앙의 단상 위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닌 늙은 여성 프로토스가 서 있었다. 암흑 기사단의 대모 라자갈이었다.
라자갈의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피난민들의 행렬을 천천히 훑었다. 그녀의 눈빛은 수천 년의 세월을 담은 듯 깊고 고요했다. 아르타니스와 제라툴이 단상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추었다. 광장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제라툴 나의 오랜 친구여. 그대가 이끄는 손님들의 몰골이 참으로 처참하구려. 라자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아이어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소.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소.
대모시여 염치없음을 알면서도 이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제라툴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저그의 위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생존자들을 거두어 주시지 않는다면 프로토스라는 종족 자체의 명맥이 끊어질 것입니다.
라자갈은 아르타니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젊은 집행관이여 그대의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나 무거워 보이는군. 대의회의 오만함이 결국 이런 비극을 낳았지만 나는 그 죄를 이 가여운 자들에게 묻지 않겠소. 우리는 모두 젤나가의 첫 번째 자손들이 아니오.
그녀의 관대한 선언에 아르타니스는 왈칵 솟구치는 감동을 억눌렀다. 대모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샤쿠라스의 법을 따를 것이며 당신들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의 검은 이제 샤쿠라스를 위해 쓰일 것입니다.
잘 생각했소. 과거의 원한에 얽매이기에는 우리의 미래가 너무나 어둡소. 라자갈이 손을 들어 피난민들을 향해 자애로운 몸짓을 취했다. 네라짐의 형제들이여 이 상처받은 자들에게 쉴 곳과 식량을 제공하라. 오늘부터 이들은 우리의 손님이자 함께 살아갈 동반자이다.
대모의 명령이 떨어지자 네라짐 주민들이 다가와 지친 칼라이 피난민들을 부축하고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수천 년간 단절되었던 두 진영이 마침내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순간이었다. 아르타니스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은 듯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저그가 난민의 뒤를 따라 샤쿠라스를 오염시키는 위기

그러나 평화의 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광장 외곽에서 날카로운 경보음이 샤쿠라스의 고요를 찢어발겼다. 정찰을 나갔던 네라짐 암흑 기사가 피투성이가 된 채 뛰어들어오며 다급하게 외쳤다. 대모시여 차원 관문이 관문이 다시 열렸습니다.
아르타니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닉스와 레이너가 후방을 지키고 있었기에 관문은 안전하게 닫혔어야 했다. 제라툴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서렸다. 누가 넘어왔단 말이냐 혹시 아이어에 남겨진 생존자들이란 말이냐.
아닙니다 저그입니다 수많은 저그 무리가 관문을 뚫고 샤쿠라스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정찰병의 절망적인 보고에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간신히 안정을 찾았던 피난민들은 다시금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우리가 짐승들을 이 성스러운 땅으로 끌어들였단 말인가. 아르타니스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자신들을 구원해 준 은인들의 고향마저 파멸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저그의 끈질긴 추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라자갈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당황하지 마라 네라짐의 전사들이여 즉시 방어선을 구축하라 칼라이의 전사들도 무기를 들어라 우리의 고향을 저 더러운 짐승들에게 내어줄 수는 없다. 대모의 우렁찬 호령이 혼란에 빠진 무리를 단숨에 다잡았다.
아르타니스와 제라툴은 즉각 전사들을 이끌고 관문이 있는 협곡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끔찍했다. 푸른 에너지를 뿜어내던 차원 관문은 이미 붉은 점막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너머로 끝을 알 수 없는 저그의 무리가 쏟아져 나와 모래 폭풍을 뚫고 진격하고 있었다.
흉측한 히드라리스크들이 독침을 쏘아대며 네라짐의 방어탑을 파괴했고 하늘에서는 뮤탈리스크 떼가 비명 소리를 내며 급강하했다. 샤쿠라스의 맑은 공기는 순식간에 피비린내와 점막의 악취로 오염되어 갔다. 칼라이와 네라짐 전사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필사의 방어전을 펼쳤다.
아르타니스의 사이오닉 검이 춤을 추며 다가오는 저글링들을 베어 넘겼지만 적의 수는 압도적이었다. 이대로라면 샤쿠라스마저 아이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절망적인 전투가 이어지던 그때 전장의 한가운데로 기이하고도 강력한 사이오닉 파동이 몰아쳤다.
케리건이 새 초월체를 경고하며 동맹을 제안하는 데서 끝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던 저그 무리가 일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그들의 목줄을 쥔 것처럼 흉포했던 짐승들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낮게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전장에 흐르는 기괴한 정적 속에서 전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무기를 고쳐 쥐었다.
저그 무리의 한가운데가 갈라지며 낯익으면서도 이질적인 형상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인간 여성의 실루엣을 하고 있으나 뼈로 이루어진 날개와 가시 돋친 껍질을 두른 존재. 칼날 여왕 케리건이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여유롭고도 오만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케리건. 제라툴이 분노로 가득 찬 일갈을 내뱉으며 앞으로 나섰다. 타소니스에서 그녀를 저그의 손에 넘겨준 테란의 비극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르타니스 역시 즉각 검을 겨누며 전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려 했다. 저 끔찍한 괴물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일 것이 분명했다.
무기를 거두는 게 좋을 텐데 기사단. 케리건의 목소리가 전사들의 정신 속으로 직접 울려 퍼졌다. 그녀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는 듯 우아한 손짓으로 주변의 저그 무리를 물러서게 했다. 난 지금 너희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오히려 너희를 도우러 왔지.
거짓말 마라 타락한 자여 초월체의 꼭두각시가 감히 우리를 기만하려 드는가. 아르타니스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케리건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초월체는 죽었어. 너희의 그 영웅적인 태사다르 덕분에 말이야. 난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지.
그녀의 말에 프로토스 지휘관들은 혼란에 빠졌다. 케리건은 그들의 동요를 즐기듯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뻐하기엔 일러. 차 행성에서 새로운 초월체가 자라나고 있거든. 다고스를 비롯한 정신체들이 그 어린 초월체를 이용해 다시 저그를 통제하려 하고 있어.
새로운 초월체라고. 제라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프로토스가 치른 그 모든 희생이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케리건은 붉게 빛나는 눈동자로 제라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 그놈이 완전히 깨어나면 나 역시 다시 노예가 될 테지. 난 그걸 원하지 않아.
그래서 너희의 힘이 필요해. 케리건이 양팔을 천천히 벌리며 제안했다. 너희는 이 지긋지긋한 저그 무리를 샤쿠라스에서 몰아내고 싶겠지 난 새로운 초월체를 파괴하고 싶고. 우리의 목적은 같아. 어때 나와 동맹을 맺는 것이. 그녀의 섬뜩한 미소 앞에서 프로토스 지도자들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댓글 1
아이어를 떠나야만 했던 그 절박한 순간들이 생생하게 그려지네요. 피닉스와 레이너의 뒷모습은 언제 봐도 마음이 짠해요. 😭 샤쿠라스에서 시작될 새로운 운명은 또 어떤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될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