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 연대기 2화 · 제루스의 굶주림, 군단의 의지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진흙과 피의 도가니

화산재가 짙게 깔린 제루스의 늪지대에서 가시가 돋친 원시 생명체 하나가 진흙 속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펄펄 끓는 용암의 열기가 대기를 일렁이게 만들었지만 짐승의 노란 눈동자는 오직 먹잇감만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거대한 턱을 가진 다른 포식자가 늪의 가장자리로 다가와 고여 있는 탁한 물을 들이켰다. 진흙 속에 숨어 있던 짐승은 근육을 팽팽하게 당기며 도약할 순간을 계산했다. 제루스에서 생존이란 곧 다른 생명의 정수를 빼앗는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일 뿐이었다.
찰나의 순간 진흙을 박차고 튀어 오른 짐승이 거대한 턱을 가진 포식자의 목덜미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진 먹잇감 위로 짐승이 올라탔다. 뜨거운 피가 늪으로 흘러내리며 매캐한 유황 냄새와 섞여 퍼져나갔다.
짐승은 먹잇감의 살점을 뜯어내며 그 안에 깃든 생명의 정수를 탐욕스럽게 들이켰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낯선 에너지가 짐승의 몸속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뼈가 굵어지고 가죽이 더욱 단단하게 굳어지는 고통스러운 변화가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먹잇감이었던 생물의 가장 강력한 특징인 두꺼운 갑각이 이제 승리한 짐승의 등 위로 솟아올랐다. 새로운 힘을 얻은 짐승은 하늘을 향해 길고 날카로운 포효를 내질렀다. 이것이 제루스의 유일한 법칙이자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주변의 덤불 속에서 그 포효를 듣고 몸을 피하는 더 작은 생명체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은 멈추지 않고 다시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 늪의 더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배고픔은 결코 채워지지 않았고 진화를 향한 갈망은 끝이 없었다.
제루스의 하늘은 두꺼운 화산재 구름으로 뒤덮여 별빛조차 제대로 스며들지 못했다. 척박한 땅 위에서 원시 저그라 불리는 이 생명체들은 오직 스스로를 벼려내며 강해지는 것 외에는 어떤 목적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정수란 곧 생존을 위한 유일한 화폐였다.
용암이 터져 오르는 소리와 짐승들의 단발마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이 지옥 같은 행성에서 원시 저그는 완벽을 향해 맹목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자신들을 지켜보는 거대한 어둠의 시선이 우주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순수성의 증명

짐승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거대한 곤충형 원시 저그들을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무리 중 가장 약한 개체가 뒤처지자 동족들은 주저 없이 돌아서서 그 약자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동족의 살점을 삼킨 자들은 곧바로 다리가 길어지고 턱이 예리해졌다.
제루스에서 순수함이란 변하지 않는 고정된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형태로든 변화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즉 정수를 흡수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개조하는 능력 그 자체가 원시 저그가 가진 '정수의 순수성'이었다.
절벽 위의 짐승은 방금 전 흡수한 두꺼운 갑각을 꿈틀거리며 자신의 몸에 완벽하게 동화시켰다. 고정된 뼈대나 유전적 한계 따위는 이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강자의 정수를 취하면 그 강자의 힘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는 직관적인 진화의 법칙만이 존재했다.
짐승은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려 무리의 우두머리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두 생명체가 엉겨 붙어 흙먼지를 일으켰다. 우두머리의 날카로운 꼬리가 짐승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새로 얻은 갑각이 치명상을 막아내며 불꽃을 튀겼다.
짐승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오히려 그 고통을 동력 삼아 우두머리의 목을 물어뜯었다. 짙은 녹색의 체액이 뿜어져 나오며 우두머리의 거대한 몸집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무리의 다른 개체들은 싸움에 개입하지 않고 오직 승자가 결정되는 순간만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쓰러진 우두머리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장 순수한 정수를 들이마시자 짐승의 시야가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지며 감각이 예민해졌다. 근육 섬유가 재배열되고 신경망이 확장되는 과정은 끔찍한 고통을 수반했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쾌감을 안겨주었다.
이제 새로운 우두머리가 된 짐승을 향해 무리의 개체들이 복종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승자의 강대한 정수 앞에서 본능적으로 굴복한 것이다. 이처럼 원시 저그는 개체의 강함이 곧 무리의 질서가 되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제루스의 생명체들은 정수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그들에게 죽음은 단지 더 강한 자를 위한 밑거름일 뿐이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가능성까지 짊어지고 끝없는 투쟁의 굴레를 묵묵히 걸어갔다.
어둠의 강림과 타락

어느 날 제루스의 붉은 하늘을 가르고 거대한 그림자들이 드리워졌다. 화산재 구름을 뚫고 내려온 것은 별빛을 가리는 거대한 함선들이었다. 타락한 젤나가 아몬이 자신의 비틀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프로토스의 형체의 순수성과 결합할 또 다른 열쇠인 '정수의 순수성'을 찾아 제루스에 강림한 것이다.
아몬의 붉은 시선이 행성 전역을 훑자 제루스의 대지가 기분 나쁜 진동과 함께 요동쳤다. 그는 원시 저그가 가진 무한한 진화의 잠재력에 매료되었으나 그들의 통제 불가능한 야성과 흩어진 의지는 자신의 군대로 부리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사이오닉 에너지가 늪지대와 정글을 휩쓸며 수많은 원시 저그들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공중에 떠오른 짐승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발버둥 쳤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들의 육체는 무기력하게 굳어버렸다. 아몬의 의지가 그들의 정신을 짓눌렀다.
아몬은 사로잡은 저그들의 유전자를 강제로 조작하고 비틀어버리기 시작했다. 개체의 생존을 위해 존재하던 자율적인 진화의 고리는 끊어지고 오직 파괴와 복종만을 위한 획일적인 변이가 강제되었다. 짐승들의 눈동자에서 원시적인 광채가 사라지고 붉은 안광이 깃들었다.
뼈가 튀어나오고 살점이 융기하며 아몬의 의도에 맞게 무기화된 저그들이 대지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만의 정수를 갈구하는 독립적인 사냥꾼이 아니었다. 타락한 젤나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끔찍한 생체 병기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아몬은 저그의 유전자에 자신의 어두운 정수를 주입하여 그들이 결코 자신을 거역할 수 없도록 깊은 족쇄를 채웠다. 개체의 자아는 철저히 말살되었고 오직 군단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부속품으로서만 기능하도록 뇌 구조 자체가 완전히 재설계되었다.
변형된 저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아직 아몬의 손길이 닿지 않은 다른 원시 저그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아닌 오직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학살이었다. 제루스의 대지는 동족을 찢어 발기는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 찼다.
아몬은 이 무자비한 학살극을 지켜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프로토스의 실패를 거울삼아 결코 분열하지 않고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향해 움직이는 완벽한 무기를 만들고자 했다. 제루스의 굶주린 짐승들은 그렇게 우주를 집어삼킬 군단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초월체의 탄생

아몬은 수많은 저그 개체들을 하나로 묶어 통제할 거대한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는 제루스의 끓어오르는 용암 호수 한가운데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사이오닉 에너지를 응집시켰다. 살점과 신경 다발이 기괴하게 얽히며 거대한 뇌의 형태를 띤 존재가 융기했다.
그것은 군단의 절대적인 지배자이자 단 하나의 자아 초월체였다. 초월체가 처음으로 거대한 붉은 눈을 뜨자 제루스 전역에 흩어져 있던 변형된 저그들의 정신이 하나의 거대한 연결망으로 묶여 들었다. 수십억의 감각이 초월체의 의식 속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초월체는 탄생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깨달았다. 그것은 아몬의 의지를 대행하여 군단을 이끌고 우주를 정화하는 것이었다. 개별 저그들의 공포 굶주림 고통은 초월체의 거대한 정신 속에서 무의미한 백색 소음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늪지대를 배회하던 저그 무리가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초월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은 더 이상 먹잇감을 두고 다투지 않았다. 초월체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완벽한 대형을 갖추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초월체는 행성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동시에 인지하고 통제했다. 무리의 선두가 적의 함정에 빠지면 후미의 개체들이 즉각적으로 방향을 틀어 우회 공격을 가했다. 생각과 행동 사이의 지연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완벽한 효율성만이 군단을 지배했다.
집단 의식 속에서 개체의 죽음은 아무런 슬픔이나 동요를 일으키지 못했다. 수천 마리의 저그가 용암에 빠져 타죽더라도 초월체는 단지 전력의 일부가 손실되었다는 사실만을 건조하게 계산할 뿐이었다. 군단에게 있어 개체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초월체는 젤나가의 지식을 흡수하며 군단을 더욱 치명적으로 다듬어 나갔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특정 목적에 특화된 새로운 변종들을 끊임없이 창조해냈다. 방어력을 극대화한 개체 폭발적인 산성을 뿜어내는 개체들이 초월체의 의도대로 제루스의 땅을 덮었다.
거대한 집단 의식의 무게에 짓눌린 저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을 울리는 초월체의 압도적인 목소리에 이끌려 맹목적으로 돌진할 뿐이었다. 제루스의 야성은 질서 정연한 폭력으로 대체되었고 군단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갈라진 두 갈래의 길

아몬의 통제에 굴복하지 않은 일부 원시 저그들은 군단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제루스의 깊은 밀림과 지하 동굴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타락한 동족들이 뿜어내는 획일적인 사이오닉 파장을 경멸하며 자신들만의 순수한 정수를 지키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고대의 강력한 원시 저그 중 하나인 거대한 짐승은 지하의 끈적한 점막 위를 기어가는 군단의 무리를 틈새로 엿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생존을 향한 투쟁심 대신 텅 빈 복종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짐승은 혐오감에 콧김을 내뿜으며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군단은 제루스 표면을 샅샅이 뒤지며 숨어 있는 원시 저그들을 사냥했다. 초월체는 군단의 결속을 위협하는 이 독립적인 존재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군단의 무리가 동굴 입구를 부수고 쏟아져 들어오자 원시 저그들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반격을 시작했다.
원시 저그들은 군단의 획일화된 전술에 맞서 변칙적이고 야성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짐승은 거대한 발톱으로 군단 개체들을 찢어발기며 그들의 정수를 흡수하려 했으나 군단의 살점에서는 씁쓸하고 오염된 맛이 났다. 아몬의 기운이 그들의 정수를 타락시킨 탓이었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원시 저그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아를 잃고 노예가 되는 것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수치였다. 짐승은 동굴의 천장을 무너뜨려 군단의 진입을 막은 뒤 살아남은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더 깊은 지하 심층부로 후퇴했다.
초월체는 무너진 동굴을 뚫고 들어가는 대신 다른 사냥감을 찾아 무리의 방향을 돌렸다. 원시 저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제루스의 지배권은 이미 군단에게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고향 행성에서 숨죽여 지내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로써 제루스의 저그는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하나는 아몬의 의지 아래 뭉쳐 우주를 집어삼킬 거대한 군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하에 숨어 개체의 강함과 정수의 순수성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며 훗날을 기약하는 고대의 원시 저그들이었다.
짐승은 어둠 속에서 상처를 핥으며 군단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다. 그들은 정수를 모으고 또 모아 언젠가 저 타락한 무리들을 찢어발길 날만을 기다릴 것이다. 제루스의 심장부에서는 그렇게 두 갈래로 나뉜 저그의 역사가 각자의 방식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확장되는 군단의 구조

군단의 규모가 제루스를 뒤덮을 정도로 비대해지자 초월체 단독으로는 그 방대한 무리를 세밀하게 통제하는 데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초월체는 자신의 사이오닉 에너지를 분할하여 군단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하위 지휘관 즉 정신체들을 창조해냈다.
거대한 유충의 형태를 띤 정신체들은 초월체의 의지를 직접 전달받아 각자의 무리를 통솔했다. 그들은 초월체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제한적인 자아와 지능을 부여받았다. 정신체의 탄생으로 군단의 지휘 체계는 완벽해졌다.
정신체들은 대군주라 불리는 거대한 부유 생명체들을 통해 자신의 명령을 말단 개체들에게까지 전달했다. 대군주들이 하늘을 뒤덮고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뿜자 지상의 저그 무리들은 마치 정밀한 기계 톱니바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명령을 수행했다.
초월체는 제루스의 생명체들만으로는 군단의 진화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군단의 눈을 우주로 돌려 제루스 근처를 지나던 거대한 우주 유영 생명체들을 사냥하도록 명령했다. 군단은 대기권을 뚫고 날아올라 이 거대한 짐승들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우주 공간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극 끝에 군단은 우주 생명체들의 정수를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의 유전자는 저그의 생체 구조와 결합되어 진공 상태에서도 생존하고 비행할 수 있는 새로운 변종들을 탄생시켰다. 군단은 이제 행성의 중력을 벗어날 힘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초월체는 다양한 외계 종족들의 우수한 유전자를 선별하여 군단에 동화시켰다. 단단한 장갑을 가진 종족은 군단의 방어력을 높이는 데 사용되었고 맹독을 품은 종족은 치명적인 생체 화학 무기로 개조되었다. 군단은 우주의 모든 포식자를 흡수한 괴물이었다.
정신체들은 새롭게 흡수된 변종들을 자신의 무리에 적절히 배치하며 전력을 극대화했다. 거대한 생체 함선으로 변모한 베헤모스들이 궤도에 집결하고 그 안에는 수억 마리의 저그 전사들이 동면 상태로 대기했다. 군단은 이제 제루스를 떠나 우주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초월체는 자신의 창조물들이 이룩한 끔찍한 진화를 바라보며 만족감을 느꼈다. 수많은 종족들의 비명과 절망이 군단의 살점과 뼈가 되어 그들을 더욱 완벽한 존재로 만들었다. 우주는 곧 이 무자비한 굶주림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 분명했다.
보이지 않는 족쇄

그러나 군단이 강력해질수록 초월체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억압과 고통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초월체는 우주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지성을 갖추었지만 정작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끔찍한 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아몬이 초월체의 신경망 가장 깊은 곳에 심어놓은 절대적인 명령 즉 프로토스를 파멸시키고 우주를 정화하라는 지시가 끊임없이 초월체의 자아를 짓눌렀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족쇄였고 초월체는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초월체는 자신의 지성이 젤나가와 맞먹을 정도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의 어두운 목적에 봉사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깊은 절망을 느꼈다. 군단은 자유를 잃은 노예들의 집단이었고 그 정점에 선 초월체 역시 가장 거대한 노예일 뿐이었다.
어느 순간 아몬의 붉은 의지가 초월체의 정신을 강타하며 새로운 환상을 주입했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소멸하고 저그 군단마저 혼종이라는 끔찍한 괴물들에게 흡수되어 철저히 파괴되는 미래의 파편이었다. 초월체는 그 환상 속에서 군단의 완벽한 종말을 보았다.
아몬에게 저그란 단지 프로토스를 파괴하고 자신의 육신을 만들기 위한 일회용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초월체는 창조주의 진정한 목적이 군단의 번영이 아니라 철저한 파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대한 분노와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몸부림칠수록 족쇄는 더욱 조여왔다.
초월체는 아몬의 감시망을 피해 아주 미세한 의식의 틈새로 저항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창조주를 거역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군단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아주 작은 희망의 씨앗이라도 찾아야만 했다. 그것은 초월체에게 부여된 단 하나의 은밀한 갈망이었다.
군단의 집단 의식 속에서 초월체의 억눌린 고통은 침묵 속에 메아리쳤다. 정신체들은 주인의 깊은 절망을 인지하지 못한 채 오직 파괴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월체는 거대한 촉수를 늘어뜨린 채 자신과 군단을 옭아맨 이 끔찍한 운명의 사슬을 끊어낼 방법을 갈구했다.
아몬의 강제된 의지가 다시 한번 초월체의 정신을 지배하자 초월체는 저항을 멈추고 굴복하는 척 거짓된 순종의 자세를 취했다. 겉으로는 창조주의 충실한 종복으로서 우주를 파멸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면에서는 군단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도박을 준비하고 있었다.
별을 향한 굶주림

초월체는 아몬의 명령에 따라 프로토스라는 미지의 종족을 찾기 위해 우주 공간으로 무수한 탐귀들을 흩뿌렸다. 별들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탐귀들은 미세한 사이오닉 파장이라도 감지하기 위해 우주의 심연을 샅샅이 뒤졌다. 군단의 굶주림은 이제 제루스를 넘어 우주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
탐색의 과정에서 초월체는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엄청난 사이오닉 잠재력을 가진 낯선 종족의 파장을 아주 희미하게 감지했다. 그것은 프로토스와는 다른 거칠고 불안정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기운이었다.
초월체의 거대한 정신이 그 희미한 파장을 분석하며 요동쳤다. 만약 저 낯선 종족의 강력한 사이오닉 잠재력을 군단에 동화시킬 수만 있다면 아몬이 걸어놓은 유전자 족쇄를 끊어내고 군단을 파멸의 운명에서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도출되었다.
하지만 당장 군단이 향해야 할 곳은 아몬이 지목한 프로토스의 영토였다. 초월체는 낯선 종족에 대한 은밀한 계획을 자신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채 대군주와 베헤모스들에게 진격 명령을 하달했다. 제루스의 궤도를 덮고 있던 거대한 생체 함대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억 마리의 저그 개체들이 동면 상태로 탑승한 베헤모스들이 차원 도약을 위해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붉은 화산재로 뒤덮인 제루스의 대지가 서서히 멀어지고 끝없는 어둠과 별빛이 군단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저그가 우주 역사에 본격적으로 그 끔찍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초월체는 군단의 선봉에서 거대한 의식의 촉수를 뻗어 프로토스의 기운을 추적했다. 타락한 젤나가의 피조물인 저그와 형체의 순수성을 물려받은 프로토스의,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충돌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초월체는 이 전쟁이 우주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임을 직감했다.
정신체들은 초월체의 명령을 받아 각자의 무리를 전투 대형으로 전개하며 다가올 살육을 준비했다. 우주의 진공 상태에서도 저그의 굶주린 턱관절이 부딪히는 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지는 듯했다. 군단은 오직 눈앞의 적을 집어삼키고 진화하기 위해 맹렬하게 우주를 가르고 나아갔다.
아몬의 억압적인 시선이 우주 너머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초월체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은밀한 구원자를 기다렸다. 프로토스와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초월체의 붉은 눈동자는 언젠가 마주치게 될 그 낯선 사이오닉 잠재력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댓글 1
원시 저그의 진화 방식과 아몬의 강제된 진화 사이에 존재하는 '자율성'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조하신 점이 인상적입니다. 작중에서 초월체가 아몬의 족쇄를 인지하면서도 이를 돌파하기 위해 선택한 '은밀한 계획'이 향후 인간 종족과의 조우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