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 연대기 18화 · 구하는 방법을 고르는 사람들
이 글의 목차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아그리아의 불길과 아리엘 핸슨

짐 레이너는 아그리아 거주지의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그의 군단이 쏟아내는 포자 구름이 맑았던 농업 행성의 대기를 탁하게 뒤덮었고, 피난민들의 다급한 비명 소리가 통신망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그는 전투복의 먼지를 털어낼 새도 없이 즉각적인 대피 명령을 하달하며 전선을 유지하라고 소리쳤다.
자치령의 군대가 피난민들을 버려두고 철수한 자리에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다. 레이너 특공대가 강하선을 타고 내려왔을 때, 아리엘 핸슨 박사는 피로에 지친 얼굴로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녀의 연구복은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사람들을 살리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핸슨 박사는 레이너를 발견하자마자 다급히 다가와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자치령이 자신들을 포기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지금은 생존자들을 우주공항까지 무사히 호송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레이너는 그녀의 헌신적인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으며 특공대원들에게 호송 차량의 호위를 지시했다.
저그의 저글링과 히드라리스크 무리가 호송대를 향해 끊임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레이너는 가우스 소총을 꽉 쥐고 선두에 서서 덮쳐오는 괴물들을 하나씩 쓰러뜨렸다. 피난민들이 탄 차량이 덜컹거리며 험난한 길을 통과할 때마다, 그는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보며 멩스크에 대한 분노를 다시금 곱씹었다.
우주공항에 도착한 피난민들은 서둘러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핸슨 박사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탑승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레이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리아의 아름다웠던 자연은 이미 저그의 점막으로 뒤덮여 흉측하게 변해가고 있었고, 그들은 고향이 파괴되는 참상을 뒤로한 채 히페리온으로 귀환해야만 했다.
히페리온의 거주 구역은 갑작스럽게 늘어난 피난민들로 인해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레이너는 함선의 복도를 걸으며 불안에 떠는 사람들의 모습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핸슨 박사는 임시 진료소를 차리고 환자들을 돌보며, 이들에게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레이너에게 토로했다.
레이너는 함교로 돌아와 맷 호너와 함께 피난민들의 처우를 논의했다. 자치령의 눈을 피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행성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너는 변방 행성인 헤이븐이 그나마 적합한 후보지라고 제안했고, 레이너는 피난민들이 그곳에서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저그의 그림자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었다. 아그리아에서 탈출한 피난민들 사이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공포의 씨앗이 심어져 있었다. 레이너는 창밖의 텅 빈 우주를 응시하며, 이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지 자신의 내면을 향해 조용히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헤이븐에 드리운 감염의 공포와 정화자

헤이븐 행성에 도착한 피난민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피난민들 중 일부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과 발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곧 저그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라는 끔찍한 사실로 밝혀졌다. 거주지는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핸슨 박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그녀는 감염이 아직 초기 단계이며,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백신을 완성해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레이너는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을 지켜보며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바로 그 순간, 헤이븐의 궤도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부신 황금빛 장갑을 두른 프로토스의 함대가 차원 도약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함대를 이끄는 집행관 셀렌디스는 히페리온으로 통신을 연결해, 헤이븐에 저그 감염이 퍼졌음을 경고하며 행성 전체를 정화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셀렌디스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이성적이었다. 그녀는 저그 감염이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니며, 오직 불길로써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만이 우주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프로토스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 무자비한 결론은 레이너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핸슨 박사는 통신 화면 속의 셀렌디스를 향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아직 감염되지 않은 무고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죽이는 것은 학살일 뿐이라며, 자신에게 치료제를 완성할 시간을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셀렌디스는 감염의 확산 속도를 고려할 때 단 1초의 지체도 용납할 수 없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함교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레이너는 과거 타소니스에서 저그에게 희생당한 수많은 생명들을 떠올렸다. 감염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을 때 벌어지는 참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프로토스의 정화 논리를 무작정 비난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생존자들을 포기하는 것도 그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셀렌디스는 레이너가 과거 프로토스와 함께 싸웠던 훌륭한 전사임을 상기시키며, 그가 대의를 위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것이라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녀의 말은 레이너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지우며, 우정이라는 이름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인간의 희망과 프로토스의 확신이 충돌하는 궤도 위에서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레이너는 굳게 닫힌 입술을 열지 못한 채 전술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헤이븐의 지표면에는 아직 생명의 불씨를 부여잡고 있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저그의 끔찍한 변이 과정과 프로토스의 무자비한 정화 광선 사이에서, 레이너는 오직 자신만이 이 비극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지휘관의 무게와 선택의 기로

레이너는 함교를 떠나 자신의 어두운 선실로 들어왔다. 낡은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구슬픈 컨트리 음악만이 그의 복잡한 심경을 위로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보안관 배지를 매만지며, 그는 자신이 마 사라에서부터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되짚어보았다. 생명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그는 홀로그램 모니터를 켜고 헤이븐의 실시간 생체 신호 데이터를 확인했다. 붉은색으로 점멸하는 감염 위험 구역과 푸른색으로 빛나는 안전 구역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핸슨 박사가 보내온 치료제 연구 데이터는 아직 미완성이었고, 성공 확률을 장담할 수 없는 숫자들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셀렌디스의 경고가 그의 귓가를 계속해서 맴돌았다. 만약 핸슨의 치료제가 실패한다면, 헤이븐은 통제 불능의 감염 행성이 될 것이고, 그 책임은 온전히 결정을 내린 레이너의 몫이 될 터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괴물로 변해 서로를 물어뜯는 환영이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며 깊은 죄책감을 자극했다.
반대로 프로토스의 정화를 용인한다면, 감염의 위협은 확실하게 제거되겠지만 무고한 생명들 역시 잿더미로 변할 것이다. 그것은 멩스크가 타소니스에서 저질렀던 학살을 방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레이너는 주먹을 꽉 쥐며 책상을 내리쳤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의 손에는 지울 수 없는 피가 묻을 수밖에 없었다.
호너가 선실 문을 두드리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는 대원들 역시 지휘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으며, 분위기가 몹시 동요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피난민들을 동정하는 이들과 저그 감염의 공포에 떠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 히페리온 내부에서도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레이너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안은 커져만 갔다.
레이너는 호너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혁명을 일으키고 독재자에 맞서 싸우는 것은 명확한 목표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누구도 정답을 알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것은 지휘관으로서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는 탄창을 확인하며 권총을 허리춤에 차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함교로 돌아온 레이너를 향해 모든 선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화면 한쪽에는 절박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는 핸슨 박사가, 다른 한쪽에는 결연한 의지로 정화 광선을 준비하는 셀렌디스가 떠 있었다. 레이너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의 결정이 훗날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든 그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기로 결심했다.
그는 통신 채널을 열고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것은 단순한 전술적 판단이 아니라, 인류가 극한의 공포 앞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시험이었다. 레이너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바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마쳤다.
(선택 분기) 헤이븐의 구원 혹은 몰락

헤이븐의 운명은 레이너가 내릴 단 한 번의 결단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요동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프로토스의 무자비한 정화에 맞서 아리엘 핸슨 박사의 신념을 지켜주기로 결심한다면, 특공대는 한때 우방이었던 강력한 프로토스 함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어야 하는 가혹한 역설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 험난한 길을 선택한다면 레이너는 프로토스의 정화 모선이 내뿜는 파괴적인 광선을 막기 위해 보호막 동력원을 차례로 파괴하며 셀렌디스의 정예 병력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아슬아슬한 전투 끝에 정화 모선을 격퇴하고 거주민들을 지켜내면, 핸슨 박사는 눈물을 흘리며 고마움을 표하고 헤이븐에 남아 언젠가 반드시 치료제를 완성하겠다고 다짐할 것이었다. 셀렌디스 역시 레이너의 굳건한 의지에 경의를 표하며 함대를 물릴 터였다.
그것은 무모해 보였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낸 값진 승리이자, 피난민들에게 선사한 일시적인 평화였다. 하지만 레이너가 그 반대의 길, 즉 프로토스의 차가운 이성을 따르기로 결심한다면 헤이븐의 하늘은 전혀 다른 비극의 불길로 타오르게 된다.
셀렌디스의 판단이 옳다고 인정하는 순간, 프로토스의 정화 광선이 헤이븐의 거주지들을 차례로 불태우는 것을 묵인해야 한다. 레이너는 감염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진 구역에 병력을 투입해, 한때 그가 구출했던 피난민들이 끔찍한 저그 괴물로 변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며 그들을 직접 사살해야 할 것이다.
그 절망적인 선택의 끝에서, 핸슨 박사는 밀폐된 연구실 안에서 홀로 치료제 개발에 매달리다 결국 저그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흉측한 감염된 테란으로 변해 이성을 잃고 울부짖는 그녀를 마주한 레이너는, 찢어지는 고통을 삼키며 직접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그녀의 비참한 숨통을 끊어주어야만 했다. 그것은 지키지 못한 약속이 남긴 참혹한 몰락이었다.
셀렌디스는 감염을 뿌리 뽑은 레이너의 결단력을 칭송하겠지만, 히페리온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씻을 수 없는 피비린내만이 남을 것이다. 텅 빈 연구실을 바라보며 느끼는 지독한 죄책감과 허무함은 그가 짊어져야 할 영원한 형벌이 된다. 헤이븐의 구원과 몰락은 이처럼 결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상호 배타적인 운명이다.
레이너는 이 두 가지 극단적인 미래의 환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무언가를 잃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휘관의 자리란 결국 가장 덜 고통스러운 비극을 골라내는 잔혹한 저울질에 불과했다.
통신 화면 속에서 셀렌디스와 핸슨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차하는 두 개의 운명선 위에서, 레이너는 마침내 무거운 입술을 뗐다. 그가 내린 결단은 히페리온의 항로를 결정지었고, 헤이븐의 하늘은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눈부신 구원의 빛이거나 파멸의 불길로 물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둠 속의 제안과 가브리엘 토시

헤이븐에서의 무거운 결정이 남긴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히페리온의 휴게실 구석에서 짙은 시가 연기를 내뿜으며 가브리엘 토시가 레이너를 불렀다. 토시의 붉은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음산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는 특유의 낮고 긁는 듯한 목소리로 멩스크에게 치명타를 입힐 새로운 계획을 제안했다.
토시는 자치령의 악명 높은 비밀 교도소인 뉴 폴섬에 대해 언급했다. 그곳에는 멩스크의 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수많은 정치범들과 암살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토시와 같은 악령 요원들이 짐승처럼 갇혀 있다고 했다. 그는 그들을 해방시킨다면 레이너 특공대에게 엄청난 전력이 될 것이라며 유혹했다.
악령 요원들은 테라진 가스와 조리움을 이용해 유령 요원들의 잠재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존재들이었다. 레이너는 토시가 보여주는 뉴 폴섬의 홀로그램 구조도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교도소를 습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지만, 그곳의 수감자들을 풀어준다면 자치령에 거대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이너는 토시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그가 합류한 이후로 보여준 기이한 행동들과 부두교 의식 같은 미신적인 태도는 대원들 사이에서도 불쾌한 소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레이너는 토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이 작전이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복수나 야욕을 위한 것이 아닌지 날카롭게 캐물었다.
토시는 씩 웃으며 자신의 동기가 무엇이든 멩스크를 끌어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상관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멩스크가 자신들을 괴물로 만들고 버렸으며, 이제 그 괴물들이 주인의 목을 물어뜯을 차례라고 섬뜩하게 속삭였다. 그 분노만큼은 레이너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진짜배기였다.
타이커스 핀들레이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범죄자들을 풀어주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토시의 그 음침한 형제들이 과연 통제가 될지 의문이라며 콧방귀를 꼈다. 타이커스의 지적대로, 강력한 사이오닉 능력을 가진 악령들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된다면 특공대에게도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토시는 자신의 형제들은 오직 멩스크를 향한 복수심으로 뭉쳐 있으며, 자신이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는 뉴 폴섬의 방어망을 무력화할 구체적인 전술을 설명하며, 레이너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어둠 속에서 뻗어온 이 동맹의 손길은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듯했다.
레이너는 시가를 꺼내 물며 복잡한 심경으로 휴게실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멩스크라는 거대한 악과 싸우기 위해서는 때로는 어둠의 힘을 빌려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히페리온의 갑판 위에 통제할 수 없는 광기를 불러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지, 그는 깊은 고민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노바의 경고와 유령의 그림자

토시와의 대화가 끝난 직후, 히페리온의 메인 컴퓨터가 갑작스러운 외부 해킹 공격을 감지하며 경고음을 울렸다. 호너가 다급히 방화벽을 복구하려 했지만, 통신 화면은 이미 누군가에게 강제로 점거당한 상태였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걷히고, 차가운 금발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유령 요원 노바 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바는 자치령 최고의 암살자답게 여유롭고도 냉혹한 태도로 레이너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토시가 레이너에게 뉴 폴섬 습격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노바는 토시가 숨기고 있는 악령 프로젝트의 끔찍한 진실을 폭로하며, 그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정한 존재들인지 경고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테라진 가스에 노출된 악령들은 심각한 정신 분열과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보이게 되며, 결국에는 피아를 식별하지 못하고 살육을 즐기는 괴물로 전락한다고 했다. 노바는 토시 역시 이미 그 광기에 잠식되어 있으며, 그가 형제들을 해방시키려는 진짜 이유는 우주에 피바람을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단언했다.
노바는 레이너에게 자치령의 적이라는 입장은 잠시 접어두고, 우주의 평화를 위해 토시의 계획을 저지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녀는 토시가 악령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비밀 시설의 위치를 제공하며, 그곳의 테라진과 조리움 저장소를 파괴한다면 자신이 직접 자치령의 유령 요원 훈련 기밀을 특공대에게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토시의 맹목적인 복수심과 노바의 차가운 실용주의가 통신망을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격돌했다. 레이너는 멩스크의 충견인 노바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심스러웠다. 그녀가 자치령의 골칫거리인 토시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속셈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노바가 전송해온 악령들의 임상 데이터와 끔찍한 부작용 기록들은 조작된 것이라 보기엔 너무나 정교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토시를 도와 뉴 폴섬의 수감자들을 풀어주는 것은 멩스크의 폭정보다 더 끔찍한 재앙을 우주에 풀어놓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레이너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노바는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며, 악령들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실패작들이라고 냉정하게 덧붙였다. 통신이 일방적으로 끊어지고 화면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함교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호너는 자치령의 요원과 손을 잡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라며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레이너는 방금 전까지 토시가 서 있던 자리를 묵묵히 응시했다. 부두교의 환영과 속삭임으로 무장한 반역자와, 차가운 사이오닉 검을 들이미는 자치령의 암살자. 두 사람 모두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그림자 속의 존재들이었다. 레이너는 다시 한번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칼날 위에 자신의 발을 올려놓아야만 했다.
(선택 분기) 악령의 해방 혹은 유령의 암살

토시와 노바가 제시한 갈림길 역시 레이너에게 극단적인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자치령의 압제에 신음하는 이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토시의 손을 잡기로 결정한다면, 특공대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자치령의 일급 비밀 수용소 뉴 폴섬의 정문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무모한 작전에 돌입해야 했다.
그 길을 택한다면, 토시는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사이오닉 능력으로 방어망을 유린할 것이고, 레이너의 병력은 그를 엄호하며 교도소의 문을 부술 것이다. 해방된 수감자들과 악령들은 멩스크를 향한 복수의 함성을 지르며 특공대에 합류하고, 토시는 자신의 방식대로 레이너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며 든든한 아군으로 남게 된다.
하지만 레이너가 노바의 경고를 받아들여 악령의 폭주를 미연에 방지하기로 결심한다면, 칼날은 동료였던 토시의 심장을 향하게 된다. 특공대는 노바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토시의 비밀 악령 훈련 기지를 습격하여, 그가 악령들을 양성하기 위해 구축해 둔 테라진 가공 시설과 주요 거점들을 철저히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 선택지에서 노바는 은신 상태로 시설에 침투해 토시의 병력들을 무자비하게 암살하며 레이너를 도울 것이다. 결국 모든 기반을 잃고 분노에 찬 토시는 히페리온에서 부두교 인형을 찌르며 저주를 퍼붓지만, 노바의 차가운 칼날에 의해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만다. 레이너는 자치령의 유령 기술을 얻지만 입맛은 쓰디쓸 것이다.
토시를 돕는 길은 멩스크의 목을 겨눌 강력한 아군을 얻는 혁명적인 선택이지만 통제 불능의 광기를 방조한다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반면 노바를 돕는 길은 잠재적 재앙을 막는 이성적 결단이지만, 결과적으로 자치령의 요원과 손을 잡고 동료를 사지로 모는 도덕적 상처를 남겼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레이너의 영혼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토시가 뉴 폴섬의 홀로그램 앞에서 광기 어린 미소를 짓는 환영과, 노바가 저격총을 어깨에 걸치고 차갑게 돌아서는 환영이 레이너의 눈앞에서 교차했다. 누구의 손을 잡든 그는 누군가를 배신해야 했고, 그 배신의 대가는 고스란히 레이너 특공대의 업보로 쌓일 것이다. 전술 지도를 바라보는 레이너의 어깨가 무겁게 처졌다.
타이커스는 곁에서 낄낄거리며 어느 쪽이든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호너는 지휘관의 어떤 결정이든 따르겠다며 굳건한 신뢰를 보냈지만, 그의 눈빛에도 짙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레이너는 권총의 실린더를 찰칵거리며 돌렸고, 금속성의 마찰음이 함교의 고요를 날카롭게 갈랐다.
악령의 사슬을 끊어낼 것인가, 아니면 유령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인가. 상호 배타적인 두 개의 작전 파일이 홀로그램 패널 위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레이너는 깊게 숨을 내쉬며 패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누르는 버튼 하나에 우주를 떠도는 유령들의 운명이 송두리째 뒤바뀔 참이었다.
믿음과 의심의 경계에 선 자

레이너는 함교의 투명한 관측창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칠흑 같은 우주를 응시했다. 헤이븐에서의 생사결, 그리고 토시와 노바 사이에서의 줄다리기는 그에게 혁명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잔혹한 현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옳은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동화처럼 아름답고 명쾌한 과정이 아니었다.
그는 손에 들린 낡은 리볼버를 만지작거렸다. 마 사라에서 보안관으로 일하던 시절, 이 총은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멩스크라는 거대한 괴물과 싸우기 위해 그는 때로는 선량한 이들의 희생을 저울질해야 했고, 때로는 속을 알 수 없는 악마들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호너가 다가와 다음 행선지에 대한 항법 데이터를 보고했다. 히페리온의 엔진이 낮게 웅웅거리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레이너는 호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수고했다는 무언의 인사를 건넸다. 대원들은 지휘관의 굳건한 뒷모습을 보며 안도했지만, 레이너의 내면은 여전히 거센 폭풍우 속에 있었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심해야 하는가. 핸슨의 순수한 희망과 셀렌디스의 차가운 이성, 토시의 끓어오르는 복수심과 노바의 냉혹한 실용주의. 그 모든 가치들이 레이너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충돌하며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이 고통스러운 번뇌야말로 자신이 아직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임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아무런 고민 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생명을 체스판의 말처럼 다루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곧 그가 타도하고자 하는 멩스크와 다를 바 없는 괴물이 되었다는 뜻일 터였다. 레이너는 창창에 비친 자신의 피로한 얼굴을 바라보며, 결코 그 선을 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휴게실에서는 타이커스가 요란한 웃음소리를 내며 용병들과 카드 게임을 즐기고 있었고, 무기고에서는 스완이 새로운 무기 도면을 보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과 상처를 안고 레이너라는 하나의 구심점 아래 모여 있었다. 그는 이들의 믿음을 배신할 수 없었다.
레이너는 관측창에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지휘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거의 망령들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그의 양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지만, 우주의 운명을 뒤흔들 저그의 위협과 뫼비우스 재단이 의뢰한 고대 유물의 비밀은 그에게 멈춰 설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짊어진 짐은 여전히 무거웠고, 나아가야 할 길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도약 준비 완료. 지휘관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호너의 단호한 목소리가 함교에 울려 퍼졌다. 레이너는 리볼버를 홀스터에 꽂아 넣고 전방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믿음과 의심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그는 오직 자신이 선택한 길의 끝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번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출발해, 맷.
댓글 1
핸슨 박사와 토시 사이에서 레이너가 짊어져야 했던 도덕적 무게감이 잘 느껴지는 글이네요. 혹시 연대기 다음 화에서는 레이너가 내린 선택들이 이후 히페리온 내부 구성원들의 신뢰 관계나 특공대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는지 다룰 계획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