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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 연대기 25화 · 남겨진 연구 노트와 거짓 구원자

이 글의 목차
  1. 이샤리 성소의 비극
  2. 남겨진 지혜
  3. 거짓 구원자의 도래
  4. 스코보스의 경계
  5. 기만과 조종
  6. 추락한 신뢰
  7. 내면의 그림자
  8. 불편한 동맹
  9. 확인한 자료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이샤리 성소의 비극

AI 복원 삽화: 무너진 이샤리 성소에서 네이렐의 차가운 시신을 마주하고 오열하는 로라스.
AI 복원 삽화: 무너진 이샤리 성소에서 네이렐의 차가운 시신을 마주하고 오열하는 로라스.

이샤리 성소의 웅장했던 대문은 검게 그을린 채 무너져 있었다. 방랑자와 로라스가 조심스레 성소 내부로 발을 들였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매캐한 연기와 잿빛으로 덮인 침묵뿐이었다. 과거 수많은 학자와 마법사들이 지혜를 나누던 도서관은 처참하게 불타올라 뼈대만 남긴 채 앙상하게 서 있었다.

"안 돼, 제발." 로라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잿더미가 된 책장 사이를 허겁지겁 헤치며 나아갔다. 방랑자 역시 무기를 꽉 쥔 채 주변을 경계했지만, 이곳에 남은 위협은 없었다. 오직 파괴가 남긴 차가운 잔해만이 두 사람의 발걸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무너진 중앙 제단 근처에서 방랑자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작고 웅크린 형체가 먼지와 재에 덮인 채 고요히 누워 있었다. 방랑자는 숨을 죽이고 다가가 그 형체의 어깨를 조심스레 돌렸다. 잿빛 얼굴 위로 평온함과 짙은 피로가 교차하는 네이렐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로라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거친 손이 네이렐의 차가운 뺨을 감쌌지만, 이미 그녀의 몸에서는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린 소녀가 홀로 감당해야 했던 영혼석의 무게와 메피스토의 끝없는 속삭임이 결국 그녀의 생명력을 모두 갉아먹은 것이 분명했다.

"내가… 내가 짐을 지웠어. 이 어린아이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도망친 거나 다름없어." 로라스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져 네이렐의 옷깃을 적셨다. 방랑자는 아무 말 없이 로라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위로의 말조차 지금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는 한낱 부질없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네이렐의 시신은 잔혹하게 훼손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굳은 표정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저항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꽉 쥔 두 주머니에는 무엇인가를 지키려 했던 흔적이 역력했다. 방랑자는 그녀의 굳은 손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그녀가 겪었을 지독한 고독과 두려움을 마음속 깊이 애도했다.

"그녀는 끝까지 싸웠소, 로라스.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을 거요." 방랑자의 낮은 목소리에 로라스는 고개를 숙인 채 오열을 삼켰다. 호라드림의 마지막 학자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로라스가 느끼는 죄책감은 그 어떤 무기보다도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성소의 무너진 천장 틈새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어 네이렐의 곁을 비추었다. 방랑자는 그녀의 시신을 반듯하게 눕히고, 주변의 온전한 천을 찾아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이것이 그들이 이 어린 영웅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마지막인 예우였다.

남겨진 지혜

AI 재구성 삽화 — 불탄 도서관에서 네이렐의 연구 노트를 읽으며 비탄에 잠긴 로라스와 방랑자.
AI 재구성 삽화 — 불탄 도서관에서 네이렐의 연구 노트를 읽으며 비탄에 잠긴 로라스와 방랑자.

네이렐의 굳게 닫힌 손안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랑자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가락을 펴자, 반쯤 타버린 가죽 장정의 연구 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표지는 불길에 그을려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안쪽의 양피지들은 네이렐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몸으로 덮어 지켜낸 덕분에 무사했다.

로라스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건네받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네이렐의 다급하고 간절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메피스토의 속삭임이 점점 커진다. 영혼석은 한계에 달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다. 라트마의 예언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만 한다." 노트의 첫 구절이었다.

노트에는 성역의 창조자들과 고대 마법에 관한 복잡한 도식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네이렐은 메피스토를 영원히 봉인하거나 파괴할 방법을 찾기 위해 이샤리 성소의 금지된 서고까지 뒤졌던 것이다. 로라스는 그녀가 홀로 감당했을 방대한 지식의 무게에 다시 한번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여기 보시오. 라트마의 예언이 단순한 종말을 뜻하는 게 아니었어." 로라스가 붉은 잉크로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릴리트의 이름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뼈로 만든 무기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네이렐은 그 무기만이 대악마의 정수를 벨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릴리트의 무기라니. 그녀는 이미 우리가 쓰러뜨리지 않았소?" 방랑자의 질문에 로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육신은 파괴되었지만, 그녀가 남긴 유물은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소. 네이렐은 이 무기를 찾아 메피스토의 육신 강림을 막으려 했던 거요." 로라스의 목소리에 점차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눈물 자국으로 번진 잉크가 남아 있었다. "로라스 아저씨, 방랑자님. 제가 실패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저는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부디 이 기록이 두 분의 길을 밝혀주기를." 그 짧은 유언은 두 사람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불꽃을 지폈다.

로라스는 노트를 가슴 깊이 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조차 그들에게는 사치였다. 네이렐이 목숨을 바쳐 남겨준 이 단서를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굳은 결의가 담긴 눈빛으로 방랑자를 마주 보았다. "우리가 끝내야 하오. 이 아이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방랑자 역시 무기를 고쳐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샤리 성소의 잔해 속에서 그들은 네이렐에게 무언의 작별을 고했다. 그녀의 육신은 차가운 재 속에 남겨졌지만, 그녀가 남긴 의지와 지혜는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끄는 등불이 되어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거짓 구원자의 도래

AI 복원 삽화: 스코보스에서 순례자들에게 거짓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아카라트 형상의 메피스토.
AI 복원 삽화: 스코보스에서 순례자들에게 거짓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아카라트 형상의 메피스토.

스코보스 제도의 푸른 바다 위로 거대한 돛을 단 순례선들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성역의 백성들은 새로운 구원자의 소문을 듣고 이 척박한 섬나라까지 험난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맹목적인 희망과 광기에 가까운 열망만이 가득 차 있었다.

거대한 광장 한가운데,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전설 속 아카라트의 완벽한 육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자비로운 미소로 순례자들을 굽어살폈다. 하지만 그 빛의 껍데기 안에는 끔찍한 증오의 군주, 메피스토의 교활한 영혼이 도사리고 있음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자녀들이여, 두려워하지 마라. 기나긴 고통의 밤은 끝났고, 이제 빛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메피스토의 목소리는 아카라트의 성스러운 음성을 흉내 내어 부드럽고 온화하게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수많은 순례자가 감격에 겨워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메피스토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서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아카라트의 순수한 영력을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겨진 작은 불만과 증오를 은밀하게 증폭시키고 있었다. 구원을 가장한 그의 손길은 사실 파멸로 이끄는 독약과도 같았다.

병든 자들이 앞으로 나아오자, 메피스토는 자애로운 손길로 그들의 이마를 짚었다. 빛이 번쩍이며 상처가 아물고 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군중은 열광하며 아카라트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들은 눈앞의 기적에 눈이 멀어, 치유받은 자들의 눈빛이 묘하게 탁해졌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너희를 억압하는 모든 굴레를 끊어내라.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 힘을 쟁취하는 자만의 것이다." 메피스토의 연설은 점차 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평화와 화합을 말하는 듯했지만, 그 이면에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대한 반역을 부추기는 교묘한 선동이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광장은 순식간에 맹목적인 신앙과 억눌린 분노가 뒤섞인 거대한 용광로로 변해버렸다. 메피스토는 이 혼돈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아카라트의 육신 안에서 자신의 본래 힘을 서서히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는 멀리 스코보스의 웅장한 신전을 바라보며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 섬의 여왕과 아마존 전사들은 아직 그의 통제 밖에 있었지만, 그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거짓 구원자의 탈을 쓴 증오의 군주는 성역 전체를 자신의 발밑에 무릎 꿇릴 완벽한 무대를 차근차근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스코보스의 경계

AI 복원 삽화: 황금빛 왕좌의 방에서 로라스의 경고를 회의적인 표정으로 듣고 있는 스코보스의 아드레오나 여왕.
AI 복원 삽화: 황금빛 왕좌의 방에서 로라스의 경고를 회의적인 표정으로 듣고 있는 스코보스의 아드레오나 여왕.

스코보스 제도의 깊은 밀림 속, 아마존들의 도시는 엄격한 규율과 쉴 새 없는 훈련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황금빛 갑옷을 두른 여전사들은 날카로운 창을 휘두르며 끊임없이 무예를 연마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영토를 지켜온 이들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왕좌의 방에서 여왕 아드레오나는 굳은 표정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는 최근 해안가로 몰려드는 이방인들과 그들이 추종하는 정체불명의 구원자에 대한 경계심으로 빛났다. 아마존의 오랜 역사는 맹목적인 믿음이 가져오는 파국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빛나는 자가 기적을 행한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교묘한 환술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경계를 두 배로 강화하고, 외부인들의 도심 출입을 전면 통제하라." 아드레오나의 단호한 명령에 호위병들은 창을 바닥에 내리치며 복종을 표했다. 그녀는 결코 스코보스를 헛된 광기에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바로 그때, 왕좌의 방 문이 열리며 로라스와 방랑자가 호위병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 들어섰다. 먼 길을 달려온 두 사람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그들의 눈빛만큼은 절박하고 강렬했다. 아드레오나는 턱을 괸 채 이 불청객들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그들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위대하신 여왕이여,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스코보스에 닥친 끔찍한 재앙을 경고하기 위해 왔소." 로라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해안에 머무는 그 자는 아카라트가 아니오. 그는 아카라트의 육신을 훔친 대악마 메피스토란 말이오!"

아드레오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대악마라고? 호라드림의 늙은 학자여, 그대의 말은 너무도 터무니없군. 그 자가 진정 악마라면 어찌하여 병자를 치유하고 평화를 설파한단 말인가?" 여왕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그녀에게 로라스의 경고는 그저 이단자들의 헛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방랑자가 나서서 거들었다. "그의 치유는 기만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증오의 씨앗을 심고 세력을 규합하고 있습니다. 제발 저희의 말을 믿고 그를 쫓아내야 합니다." 방랑자의 진심 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아드레오나의 표정은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스코보스의 안위는 내가 결정한다. 이방인들의 싸움에 내 전사들의 피를 흘리게 할 수는 없다. 당장 이 자들을 밖으로 끌어내라." 아드레오나가 손을 까딱하자 호위병들이 창끝을 겨누며 다가왔다. 로라스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고, 방랑자는 무기를 쥔 손에 힘을 빼며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만과 조종

AI 복원 삽화: 조종당한 로라스에게 습격당한 아드레오나 여왕을 아카라트 형상의 메피스토가 치료하는 모습.
AI 복원 삽화: 조종당한 로라스에게 습격당한 아드레오나 여왕을 아카라트 형상의 메피스토가 치료하는 모습.

로라스가 다시 한번 입을 열어 여왕을 설득하려던 찰나, 그의 머릿속을 날카로운 이명이 강타했다. 눈앞이 붉게 물들며, 귓가에는 메피스토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어리석은 늙은이, 네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보이지 않는 악의 기운이 로라스의 신경을 완전히 장악했다.

로라스의 두 눈이 초점을 잃고 탁한 회색으로 변했다.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손이 움직이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번개처럼 뽑아 들었다. 방랑자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로라스는 짐승 같은 괴성을 지르며 단상을 향해 도약하여 여왕 아드레오나를 향해 칼날을 휘둘렀다.

"로라스! 안 돼!" 방랑자가 다급히 소리치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아드레오나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으나, 로라스의 단검은 그녀의 어깨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황금빛 갑옷 위로 튀었고, 왕좌의 방은 순식간에 경악과 혼돈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호위병들이 분노에 찬 함성을 지르며 로라스를 덮쳤다. 육중한 창자루가 로라스의 등을 강타했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방랑자가 무기를 꺼내 들려 했지만, 무수한 창끝이 방랑자의 목덜미를 겨누며 움직임을 봉쇄했다. 로라스는 여전히 짐승처럼 헐떡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왕좌의 방 문이 활짝 열리며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카라트의 형상을 한 메피스토가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아마존 호위병들조차 뿜어져 나오는 성스러운 기운에 압도되어 무의식적으로 길을 내어주고 말았다.

메피스토는 피를 흘리며 주저앉은 아드레오나에게 다가갔다. "오, 고귀한 여왕이여. 어둠에 물든 자의 흉계에 상처를 입으셨군요." 그는 다정하게 속삭이며 손에서 따뜻한 빛을 뿜어내어 여왕의 상처를 감쌌다. 베인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고,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드레오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으려 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기적과 몸을 감싸는 평온함에 점차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진정 나를 구원한 것인가?" 그녀의 떨리는 물음에 메피스토는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 계산된 거짓 구원의 연극이 찬란하게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메피스토는 바닥에 짓눌린 로라스를 향해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악마의 꾐에 빠져 이성을 잃은 가엾은 영혼이여. 당신의 죄를 용서하겠소." 그 가증스러운 선언에 로라스의 정신을 옭아매던 마수가 순식간에 풀려났다. 제정신이 돌아온 로라스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깨닫고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추락한 신뢰

AI 복원 삽화: 스코보스 성벽 밖에서 절망에 빠진 로라스를 위로하는 방랑자.
AI 복원 삽화: 스코보스 성벽 밖에서 절망에 빠진 로라스를 위로하는 방랑자.

"아니야! 내가 한 짓이 아니오! 저놈이 내 정신을 조종한 거란 말이오!" 로라스가 결박된 채 바닥에 엎드려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왕좌의 방 안에서 공허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아마존 전사들의 눈에는 오직 여왕을 암살하려 한 비열한 노인만이 보일 뿐이었다.

아드레오나는 상처가 아문 어깨를 감싸 쥐며 차갑게 로라스를 내려다보았다. "닥쳐라, 암살자여. 네놈의 그 추악한 변명은 내 귀를 더럽힐 뿐이다. 빛의 사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네놈의 칼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여왕의 목소리에는 깊은 분노와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메피스토는 아드레오나의 곁에 서서 승자의 미소를 교묘하게 숨긴 채 방랑자와 로라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희는 결코 나를 이길 수 없다'고 조롱하고 있었다. 로라스는 그 시선을 마주하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호라드림의 명예가 시궁창에 처박힌 순간이었다.

"이 자들의 목을 쳐라!" 아드레오나의 서릿발 같은 명령이 떨어지자 호위병들이 창을 치켜들었다. 그때, 방랑자가 맹렬한 기세로 몸을 일으켜 호위병들을 밀쳐내고 로라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자는 조종당했을 뿐입니다! 저희를 죽인다면 당신들은 진정한 적에게 속아 넘어가는 꼴이 될 것입니다!"

방랑자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결연함에 호위병들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아드레오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손을 들어 병사들을 제지했다. "좋다. 내 신성한 궁전을 피로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 당장 이 섬에서 떠나라.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띄면 그땐 자비 없이 베어버리겠다."

무장 해제당한 채 스코보스의 외곽으로 쫓겨난 로라스는 진흙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끝났어… 메피스토가 여왕의 신임마저 얻어버렸어. 나는 아무것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놈의 계획을 도와준 꼴이 되었군." 그의 목소리는 짙은 자괴감과 패배감으로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방랑자는 로라스의 곁에 무릎을 꿇고 그의 떨리는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로라스. 당신의 잘못이 아니란 걸 나는 압니다. 놈은 우리를 분열시키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방랑자의 단호한 위로에 로라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이렐이 남긴 노트를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겐 아직 릴리트의 무기라는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메피스토의 환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다음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방랑자의 말에 로라스의 흐려졌던 눈동자에 미세한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들은 절망의 늪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새로운 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면의 그림자

AI 복원 삽화: 붉은 안개가 자욱한 초현실적인 정신 영역에서 릴리트의 영혼과 마주한 방랑자.
AI 복원 삽화: 붉은 안개가 자욱한 초현실적인 정신 영역에서 릴리트의 영혼과 마주한 방랑자.

스코보스의 인적이 드문 동굴 깊숙한 곳, 방랑자는 네이렐의 연구 노트를 펼쳐놓고 가부좌를 틀었다. 노트에 적힌 고대의 명상법은 시각을 차단하고 내면의 깊은 심연으로 침잠하는 위험한 의식이었다. 방랑자는 눈을 감고 검은 천으로 두 눈을 단단히 가린 채,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미세한 맥박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주변의 소음이 차츰 멀어지고, 차가운 동굴의 공기마저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방랑자의 의식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시간과 공간의 감각이 사라진 그곳은 오직 붉은 안개만이 자욱하게 깔린 기괴하고도 고요한 정신의 영역이었다.

방랑자가 천천히 눈을 뜨자, 시야를 가렸던 천은 온데간데없고 발밑으로는 끈적한 핏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곳은 방랑자의 육신이 아니라, 과거 릴리트의 피를 마신 이후 영혼 깊숙한 곳에 새겨진 결속의 공간이었다. 붉은 안개 너머로 거대하고 위압적인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내게로 다시 돌아왔구나, 나의 아이야." 뼛속까지 스며드는 매혹적이고도 서늘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안개가 걷히며 뿔이 달린 고귀한 자태의 악마, 릴리트의 영이 방랑자의 눈앞에 강림했다. 그녀의 육신은 파괴되었지만, 방랑자의 핏속에 남은 정수가 그녀의 영혼을 이 내면의 공간에 붙잡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방랑자는 반사적으로 무기를 찾으려 했지만, 이 정신의 공간에서 물리적인 무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을 부활시키러 온 것이 아니다. 메피스토를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이 저주받은 피의 연결을 이용했을 뿐이다." 방랑자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릴리트는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와 방랑자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려 했다. 방랑자가 고개를 돌려 피하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내 아버지는 성역을 집어삼킬 것이다. 너희 필멸자들의 힘만으로는 그 교활한 늙은이를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너도 이미 깨달았을 텐데?"

"그래서 당신의 무기가 필요하다. 네이렐의 노트에 적힌, 당신의 뼈로 만들었다는 그 단검 말이다." 방랑자의 말에 릴리트의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그녀는 잠시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듯 시선을 허공에 두더니,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단검은 내 첫 번째 아이, 라트마에게 주려 했던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아이는 내 제안을 거절하고 운명을 피하려 했지." 릴리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슬픔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다시 방랑자를 직시하며, 이 내면의 조우가 성역의 운명을 바꿀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불편한 동맹

AI 복원 삽화: 어두운 동굴에서 깨어나는 방랑자와 그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로라스.
AI 복원 삽화: 어두운 동굴에서 깨어나는 방랑자와 그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로라스.

"내 뼈로 벼려낸 단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다. 그것은 악마의 정수를 베어내고 영혼의 결속을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릴리트가 붉은 안개 속을 거닐며 설명했다. 그녀의 걸음마다 바닥의 핏물이 기괴한 문양을 그리며 파동을 일으켰다. 방랑자는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그 단검으로 메피스토를 찌르면, 그를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공허 속으로 추방할 수 있다.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어 그 어떤 차원에도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 릴리트의 제안은 방랑자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지옥에서의 끝없는 부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희망이었다.

방랑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릴리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왜 우리를 돕는 거지? 당신 역시 성역을 지배하려 했던 악마가 아닌가. 이 협력의 대가로 내 육신을 빼앗아 부활하려는 수작이라면 당장 집어치워라." 방랑자의 날카로운 지적에 릴리트는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내 육신은 이미 흩어졌고, 이 작은 정수만으로는 부활할 수 없다. 나는 그저 내 아버지가 내가 창조한 성역을 파괴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을 뿐이다." 릴리트의 눈빛이 일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너는 나를 믿지 않겠지만, 지금 네게 다른 선택지가 있느냐?"

방랑자는 침묵했다. 로라스는 절망에 빠졌고, 스코보스의 여왕은 메피스토의 거짓에 넘어갔다. 방랑자 홀로 대악마의 군대와 맞설 수는 없었다. 릴리트와의 협력은 독이 든 성배를 마시는 것과 같았지만, 메피스토를 공허로 영원히 추방할 수 있다면 그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좋다. 당신의 단검을 찾는 일에 동의하겠다. 하지만 명심해라. 당신이 조금이라도 나를 조종하려 든다면, 내 목숨을 끊어서라도 이 피의 연결을 파괴해 버릴 테니까." 방랑자의 결연한 선언에 릴리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목적을 위해 손을 잡는 불편한 동맹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단검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성역 곳곳에 숨겨져 있다. 내가 그 위치로 너를 인도하마. 하지만 서둘러야 할 것이다. 내 아버지의 힘이 온전히 회복되기 전에 끝내야 하니까." 릴리트의 형상이 점차 붉은 안개 속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내면의 공간이 무너지며 현실의 감각이 방랑자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방랑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가렸던 천을 벗어 던졌다. 차가운 동굴의 공기가 폐부를 찌르며 현실로 돌아왔음을 알렸다. 곁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로라스가 다가왔다. 방랑자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어둠 속에서 찾아낸 위태로운 희망의 불씨를 로라스에게 전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인한 자료

Blizzard · 네이렐의 추모 기록

Blizzard · 증오의 군주 캠페인과 스코보스

GameSpot · 블리자드 개발진의 증오의 군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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