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연대기 23화 · 봉인해야 할 것은 누구였는가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늑대의 제안

지옥의 붉은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길목에서, 피 묻은 가죽을 뒤집어쓴 거대한 늑대가 방랑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짐승의 형상을 한 메피스토는 기괴하게 일그러진 입을 벌려 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는 방랑자가 짊어진 짐의 무게를 아는 듯이 교활한 눈빛을 번뜩였다.
"네가 쫓는 어미는 이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빚어내려 하고 있다." 늑대의 목소리는 머릿속을 직접 파고들 듯 울렸다. 방랑자는 검자루를 움켜쥐었지만, 당장 짐승을 칠 수는 없었다. 늑대는 릴리트의 계획이 얼마나 무모하고 파괴적인지 경고하며, 자신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부추겼다.
늑대는 방랑자에게 릴리트가 성역의 인간들을 어떻게 장기말로 쓰려 하는지 낱낱이 속삭였다. "그녀는 너희를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전쟁의 도구로 삼으려 한다." 메피스토의 말은 방랑자의 내면에 자리한 불안을 교묘하게 찌르며, 유일한 해결책은 자신뿐이라고 주장했다.
늑대의 붉은 눈동자 속에는 지옥의 끝없는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방랑자는 숨을 고르며 늑대의 제안이 품고 있는 독을 가늠했다. 증오의 군주가 건네는 도움은 결코 대가 없이 주어지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릴리트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곁에 선 네이렐은 붕대로 거칠게 감싼 왼팔의 통증을 참아내며 늑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남은 오른손은 푸른 사파이어 영혼석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방랑자는 네이렐의 굳은 표정을 보며, 이 짐승의 달콤한 제안 뒤에 숨겨진 파멸의 그림자를 다시금 떠올렸다.
"나의 정수가 있는 곳으로 너희를 안내하마." 늑대는 방랑자의 망설임을 비웃기라도 하듯 거만한 태도로 선언했다. 그는 릴리트가 도착하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며 재촉했다. 방랑자는 늑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릴리트를 막기 위해서는 일단 그가 이끄는 곳으로 향해야만 했다.
늑대가 허공을 향해 앞발을 휘젓자, 핏빛으로 물든 차원문이 기괴한 소음과 함께 찢어지듯 열렸다. 차원문 너머로는 증오의 대성당 깊은 곳의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메피스토는 방랑자와 네이렐을 돌아보며, 자신을 따라오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는 차원문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방랑자는 늑대가 사라진 붉은 소용돌이를 응시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옥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예고하고 있었다. 방랑자는 네이렐과 짧게 눈을 맞춘 뒤, 결연한 의지로 무기를 고쳐 쥐고 차원문의 끔찍한 빛 속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릴리트의 환영과 유혹

차원문을 통과해 증오의 대성당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동안, 방랑자의 시야가 갑자기 붉은 안개로 뒤덮였다. 물리적인 공간은 사라지고, 오직 방랑자의 핏속에 깃든 릴리트의 기운만이 선명하게 요동쳤다. 귓가에는 어머니라 불리는 자의 부드럽고도 강압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환영 속에서 릴리트는 핏빛 드레스를 흩날리며 방랑자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은 자애로움과 잔혹함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나의 아이야, 너는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길을 걷느냐." 릴리트는 방랑자의 뺨을 어루만지듯 손을 뻗으며, 성역을 향한 자신의 웅대한 계획을 속삭였다.
릴리트는 방랑자에게 천상과 지옥의 영원한 굴레를 끊어낼 유일한 방법은 자신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녀는 나약한 인간들이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도가 필요하며, 방랑자가 그 최선봉에 서야 한다고 유혹했다. 환영 속의 릴리트는 방랑자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힘에 대한 갈망을 자극했다.
방랑자는 릴리트의 목소리가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키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말은 달콤했지만, 그 이면에는 성역의 모든 생명을 자신의 발밑에 굴복시키려는 지배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방랑자는 피의 연결을 끊어내려 발버둥 쳤지만, 릴리트의 환영은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나와 함께라면 너는 성역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다." 릴리트는 방랑자에게 무한한 권력과 영광을 약속하며, 호라드림의 낡은 신념을 버리라고 종용했다. 그녀는 방랑자가 겪어온 상실과 고통을 들먹이며, 오직 자신만이 그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방랑자는 환영 속에서 검을 휘둘렀지만, 릴리트의 형체는 붉은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 뿐이었다. 그녀는 방랑자의 저항을 비웃으며, 피로 맺어진 유대는 결코 끊어질 수 없다고 선언했다. 방랑자의 심장 박동이 거세어지고, 이마에는 차가운 식은땀이 맺히며 극심한 혼란이 밀려왔다.
릴리트의 환영은 방랑자의 정신을 옥죄며 마지막 선택을 강요했다. 그녀는 방랑자가 자신을 거부한다면 성역은 영원한 파멸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방랑자는 릴리트의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자신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과연 무엇이 옳은 길인지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다.
붉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현실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자, 방랑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환영은 사라졌지만, 릴리트가 남긴 유혹과 지배의 씨앗은 여전히 방랑자의 핏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방랑자는 자신의 이성이 온전한지 의심하며, 다가올 결단의 순간을 두려워했다.
대성당의 심장과 맡겨진 선택

방랑자와 네이렐이 도착한 곳은 증오의 대성당 가장 깊숙한 방이었다. 거대한 핏줄들이 벽을 타고 흐르는 그곳 중앙에는, 메피스토의 수복 중인 정수가 기괴한 고동을 치며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늑대 형상의 메피스토는 그 정수 앞에서 몸을 웅크린 채, 방랑자 일행을 맞이했다.
늑대는 릴리트가 아직 이곳에 도달하지 못했다며, 지금이 바로 증오의 군주와 손을 잡고 그녀를 막을 유일한 기회라고 재촉했다. 방랑자는 수복 중인 메피스토의 정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끔찍한 악의 기운을 느끼며, 이 짐승의 제안이 성역을 더 큰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직감했다.
방랑자는 방금 전 릴리트의 환영이 남긴 정신적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의 피에 섞인 릴리트의 영향력이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방랑자를 짓눌렀다. 방랑자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쥔 채, 메피스토의 정수와 늑대를 번갈아 바라보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
곁에 선 네이렐은 붕대로 감긴 왼팔의 통증을 억누르며, 남은 오른손으로 푸른 사파이어 영혼석을 가슴에 꽉 품었다. 그녀의 눈빛은 두려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결의를 담고 있었다. 방랑자는 네이렐의 굳건한 모습을 보며, 릴리트의 피에 오염되지 않은 그녀만이 순수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판단을 믿을 수 없어." 방랑자는 갈라진 목소리로 네이렐에게 고백했다. 릴리트의 환영이 보여준 유혹과 지배의 속삭임이 여전히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방랑자는 네이렐에게 다가가, 성역의 명운이 걸린 이 끔찍한 선택의 무게를 그녀에게 온전히 넘기겠다는 뜻을 전했다.
네이렐은 방랑자의 말에 잠시 숨을 멈추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의 크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이렐은 오른손에 쥔 푸른 영혼석을 들어 올리며, 방랑자의 신뢰에 보답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건넸다. 방랑자는 그녀의 결정을 묵묵히 지지하기로 했다.
늑대는 방랑자가 네이렐에게 선택을 넘기는 모습을 보며 불길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짐이라며 조롱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메피스토의 정수는 늑대의 웃음소리에 맞춰 더욱 거세게 박동하며 방 안을 붉게 물들였다.
방랑자는 네이렐의 뒤로 물러서서 주위를 경계했다. 릴리트가 언제 이 방에 들이닥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방랑자는 네이렐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다짐하며, 다가올 전투를 위해 굳게 닫힌 대성당의 문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숨죽여 기다렸다.
네이렐의 결단과 봉인

네이렐은 수복 중인 메피스토의 정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늑대는 그녀가 릴리트를 막기 위해 자신을 해방할 것이라 기대하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네이렐의 눈빛은 늑대가 아닌, 붉게 맥동하는 증오의 정수 그 자체를 향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릴리트도 위험하지만, 당신은 더 큰 재앙이야." 네이렐은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하며 오른손에 쥔 푸른 사파이어 영혼석을 높이 치켜들었다. 늑대의 여유롭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네이렐은 메피스토의 속삭임에 휘둘리지 않고, 증오의 군주를 먼저 가두기로 결단한 것이다.
네이렐이 호라드림의 주문을 외우자, 푸른 영혼석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와 메피스토의 정수를 감싸기 시작했다. 수복 중이던 붉은 기운이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영혼석 안으로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갔다. 이것은 늑대의 육체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대성당에 깃든 증오의 본질을 봉인하는 의식이었다.
늑대는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지르며 네이렐을 위협했지만, 정수가 봉인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의 형체 또한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네이렐은 붕대 감긴 왼팔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을 악물고 견디며, 오직 오른손의 악력만으로 영혼석을 굳게 쥐고 의식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마침내 메피스토의 마지막 정수마저 푸른 사파이어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방 안을 가득 채우던 붉은빛이 일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늑대의 환영은 완전히 소멸했고, 영혼석은 증오의 군주를 품은 채 불길한 푸른빛을 점멸했다. 네이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영혼석의 차가운 감촉을 확인했다.
봉인을 마친 네이렐은 방랑자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이것을 멀리 가져갈게. 당신은 그녀를 막아줘!" 네이렐은 영혼석이 뿜어내는 사악한 기운이 방랑자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방랑자는 그녀의 용기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이렐은 영혼석을 짐 속에 단단히 갈무리하고, 절단된 왼팔의 고통을 참으며 잰걸음으로 대성당의 비밀 통로를 향해 달려갔다. 방랑자는 그녀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제 방랑자에게 남은 임무는 다가오는 릴리트를 홀로 맞이하여 끝장내는 것뿐이었다.
네이렐이 빠져나간 직후, 대성당의 육중한 문이 산산조각 나며 릴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메피스토의 정수가 사라진 텅 빈 방을 보며 분노로 일그러진 비명을 질렀다. 방랑자는 검을 고쳐 쥐고, 피로 맺어진 환영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증오의 딸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방랑자와 릴리트의 사투

릴리트의 붉은 날개가 대성당의 허공을 가르며 매서운 돌풍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가로챈 방랑자의 배신에 분노하며,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방랑자는 방패를 들어 그 공격을 간신히 튕겨냈지만, 엄청난 충격에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굴렀다.
"네가 감히 나의 구원을 거부하고 파멸을 선택하느냐!" 릴리트의 목소리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기괴하게 갈라졌다. 그녀는 핏빛 마법을 난사하며 방랑자의 퇴로를 차단했다. 방랑자는 쏟아지는 핏빛 가시들을 피하며, 오직 살아남아 이 질긴 악연을 끝내겠다는 일념으로 검을 휘둘렀다.
릴리트는 방랑자의 핏속에 깃든 자신의 기운을 다시 한번 자극하려 시도했다. 방랑자의 시야가 붉게 명멸하며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지만, 네이렐이 보여준 결단은 방랑자의 의지를 굳건하게 붙잡아 주었다. 방랑자는 고통을 딛고 일어나, 릴리트의 마법 방벽을 뚫고 맹렬한 반격을 가했다.
방랑자의 검이 릴리트의 날개 한쪽을 깊게 베어내자, 검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릴리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더욱 흉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대성당의 바닥이 갈라지고, 부서진 기둥들이 무너져 내리며 두 존재의 사투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방랑자는 릴리트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점차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방랑자는 성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희생된 이들을 향한 부채감을 떠올리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 냈다.
릴리트가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순간, 방랑자는 그녀의 움직임에서 치명적인 빈틈을 발견했다. 방랑자는 주저 없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온 체중을 실어 검을 릴리트의 가슴 한가운데로 찔러 넣었다. 검날이 릴리트의 심장을 꿰뚫는 둔탁한 소리가 대성당을 울렸다.
릴리트의 두 눈이 크게 떠지며 경악과 허탈함이 교차했다. 그녀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고, 거대한 날개는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너희는... 스스로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릴리트는 저주 섞인 유언을 남기며, 방랑자의 검에 꿰뚫린 채 천천히 바닥으로 추락했다.
릴리트의 육신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녀의 몸은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방랑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붉은 재로 변해가는 증오의 딸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길고 끔찍했던 사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깊은 적막이 부서진 대성당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방랑자는 마침내 무기를 거두었다.
불완전한 승리와 상처

지옥의 끔찍한 여정을 마치고 성역으로 돌아온 방랑자는, 황량한 대지 위에 홀로 서 있는 로라스를 발견했다. 늙은 호라드림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방랑자를 맞이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겪은 참혹한 전투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로라스는 방랑자의 찢겨진 갑옷과 피로 얼룩진 얼굴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릴리트는 끝났는가." 그의 물음에는 안도감보다는 무거운 피로가 묻어났다. 방랑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 짧은 긍정 속에는 승리의 환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방랑자는 로라스에게 다가가, 이나리우스의 군대가 맞이한 처참한 최후와 도난의 죽음을 떠올렸다. 성역을 지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피가 흘렀고, 그 대가는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았다. 로라스 역시 오랜 동료를 잃은 슬픔을 억누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이겼지만, 남은 것은 폐허뿐이군." 로라스는 부서진 대지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방랑자는 그의 말에 동의하며, 릴리트가 남긴 파괴의 흔적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성역은 구원받았을지 모르나, 상처 입은 대지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데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방랑자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릴리트의 피가 섞였던 그 불길한 연결고리는 그녀의 죽음과 함께 끊어졌지만, 영혼에 새겨진 상흔은 여전히 욱신거렸다. 방랑자는 자신이 내린 수많은 선택들이 과연 최선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을 뿌린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문했다.
로라스는 방랑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묵직한 위로를 건넸다. "자책하지 말게. 우리는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살아남은 자로서 서로를 의지하려는 따뜻한 연민이 담겨 있었다. 방랑자는 로라스의 손길에서 작은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지울 수 없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메피스토를 봉인한 영혼석을 들고 홀로 떠난 네이렐의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로라스는 네이렐이 짊어진 짐의 무게를 안타까워하며, 그녀가 무사히 그 악의 기운을 통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옷깃을 스쳤다. 방랑자와 로라스는 폐허가 된 성역의 풍경을 뒤로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임시 야영지로 향했다. 릴리트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마주한 승리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른, 지독하게 불완전하고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남겨진 편지

임시 야영지에 도착한 방랑자는 네이렐이 머물렀던 낡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은 주인이 황급히 떠난 듯 텅 비어 있었고, 차가운 공기만이 감돌았다. 방랑자는 주변을 살피던 중, 나무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양피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네이렐이 남긴 편지였다.
방랑자는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펼쳐 들었다. 익숙한 네이렐의 필체는 곳곳에 번져 있어, 그녀가 얼마나 다급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글을 써 내려갔는지 짐작게 했다. 방랑자는 편지의 첫 줄을 읽어 내려가며, 깊은 탄식과 함께 그녀가 홀로 짊어지려 한 짐의 무게를 실감했다.
"방랑자여,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나는 이미 멀리 떠났을 거예요." 네이렐의 편지는 담담하게 시작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짙은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메피스토를 가둔 영혼석의 기운이 너무나 강력하여,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까 봐 홀로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적었다.
편지 속에서 네이렐은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토로했다. 그녀는 릴리트 대신 메피스토를 봉인한 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었으며, 영혼석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속삭임이 벌써부터 자신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고 고백했다. 방랑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를 찾지 마세요. 이것은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니까요." 네이렐은 방랑자에게 자신을 쫓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녀는 호라드림의 마지막 후계자로서 이 저주받은 영혼석을 안전한 곳에 숨기고, 메피스토의 영향력을 영원히 차단할 방법을 찾겠다고 다짐했다.
방랑자는 편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왼손을 잃고 붕대를 감은 채, 그 끔찍한 악마의 정수를 홀로 품고 떠난 어린 소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방랑자는 네이렐에게 너무 가혹한 짐을 떠넘긴 자신을 원망하며, 그녀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로라스가 천막 안으로 들어와 방랑자의 굳은 표정과 손에 들린 편지를 보았다. 로라스는 양피지를 건네받아 묵묵히 읽어 내려갔고, 그의 주름진 얼굴에도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이 번졌다. "어리석고 용감한 아이로군..." 로라스는 목이 멘 소리로 중얼거리며 편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방랑자는 탁자 위에 놓인 편지를 다시 한번 응시하며 결의를 다졌다. 네이렐이 자신을 찾지 말라고 했지만, 방랑자는 그녀가 홀로 파멸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방랑자는 언젠가 반드시 그녀의 흔적을 쫓아,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 지겠다고 마음속 깊이 맹세했다.
나한투를 향한 고독한 항해

짙은 안개가 깔린 남쪽 물길 위로 작은 나룻배 한 척이 외롭게 미끄러져 나갔다. 배 위에는 네이렐이 여행 짐을 곁에 둔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왼팔은 피가 배어 나온 붕대로 두껍게 감겨 있었고, 남은 오른손은 품속의 푸른 사파이어 영혼석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네이렐은 붕대 감긴 왼팔에서 전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보다, 영혼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한기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푸른빛을 내뿜는 돌덩이는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맥동하며, 그녀의 손바닥을 통해 불길한 기운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었다. 네이렐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귓가에는 메피스토의 교활한 속삭임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늑대의 환영이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그녀의 공포를 자극했다. "네가 나를 가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나약한 아이야." 환영 속의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며 조롱했고, 네이렐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환청을 떨쳐내려 애썼다.
영혼석 속의 악의 영향력은 네이렐의 정신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어머니의 죽음, 동료들의 희생, 그리고 절단된 왼손의 끔찍한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그녀를 괴롭혔다. 네이렐은 숨을 헐떡이며, 이 끔찍한 고문이 언제 끝날지 절망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네이렐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은 오른손에 온 힘을 주어 영혼석을 더욱 꽉 쥐었다. "나는 호라드림이다. 네깟 환영에 굴복하지 않아." 네이렐은 떨리는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늑대의 속삭임에 저항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배는 나한투의 험준한 밀림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네이렐은 그곳에 영혼석의 기운을 억누를 수 있는 고대의 지식이나 은신처가 있기를 막연히 기대했다. 그녀는 방랑자와 로라스가 릴리트를 무사히 물리쳤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짊어진 이 끔찍한 짐이 그들에게 닿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안개가 잠시 걷히고 차가운 달빛이 수면을 비추었다. 네이렐은 수면에 비친 자신의 야윈 얼굴을 바라보며 깊은 고독을 느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증오의 군주만이 그녀의 유일한 동행자였다. 네이렐은 붕대 감긴 왼팔을 가슴에 밀착시키며, 밀려오는 추위와 외로움을 견뎌냈다.
나룻배는 어둠이 짙게 깔린 남쪽 강물을 따라 끝없는 여정을 이어갔다. 네이렐은 영혼석의 푸른빛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옷자락으로 단단히 감싸 안았다. 다가올 나한투에서의 시련이 얼마나 가혹할지 알 수 없었지만, 네이렐은 홀로 증오의 무게를 짊어진 채 묵묵히 미지의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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