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연대기 12화 · 하로가스가 지키던 마지막 산
이 글의 목차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바알의 북부 침략과 하로가스의 절망

차가운 북풍이 아리앗 산맥의 헐벗은 봉우리를 때리며 매서운 눈보라를 일으켰다. 하로가스의 거대한 방벽 앞에는 바알이 이끄는 악마 군단이 남긴 끔찍한 파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영웅이 간신히 도착한 야만용사들의 마지막 요새는 짙은 절망과 피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용병대장 퀄케크는 성벽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동족을 잃은 슬픔과 악마를 향한 끓어오르는 분노가 깊게 패어 있었다. 그는 이방인 영웅을 경계하면서도, 이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을 한 가닥 희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광장 한구석에서는 치유사 말라가 부상당한 야만용사들의 끔찍한 상처를 묵묵히 치료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름진 손길은 따뜻했지만, 눈빛에는 다가오는 종말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말라는 영웅의 손을 쥐며 아리앗 산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간절한 목소리로 기원했다.
라주크의 대장간에서는 무기를 벼리는 묵직한 망치 소리만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는 악마들에게 포위된 채 죽어간 형제들의 복수를 다짐하며, 밤낮없이 쇳물을 녹이고 칼날을 세웠다. 라주크는 영웅에게 자신이 만든 가장 예리한 무기를 건네며 피의 복수를 부탁했다.
정찰병들이 헐떡이며 달려와 바알의 본대가 이미 산 중턱을 넘어 성채로 진군하고 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방벽을 두드리는 투석기의 굉음이 지진처럼 마을 전체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퀄케크는 굳은 표정으로 방패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원로 장로들이 모두 목숨을 잃은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니흘라탁만이 광장 구석에서 냉소적인 시선으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영웅의 등장조차 무의미한 발버둥이라 조롱하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차가운 태도에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영웅은 굳게 닫힌 거대한 나무 성문을 열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전장으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퀄케크는 영웅의 결연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마침내 성문을 열어주며 핏빛 언덕의 위험성을 무겁게 경고했다. 악마들의 피로 붉게 물든 산길이 영웅의 발걸음을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뼈를 깎는 듯한 추위 속에서 영웅은 무기를 꽉 쥐고 하로가스의 방벽 너머로 첫발을 내디뎠다. 눈보라 너머로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다가오는 악마들의 실루엣이 수없이 일렁였다. 성역의 운명을 건 마지막 전투가 험준한 아리앗 산맥의 비탈길에서 마침내 그 잔혹한 막을 올렸다.
핏빛 언덕의 쉔크 처치와 포로 구출

핏빛 언덕에 들어서자 끔찍한 유황 냄새와 함께 살점이 타들어 가는 악취가 진동했다. 산비탈 곳곳에는 거대한 공성 투석기들이 불타는 바위를 하로가스 성벽을 향해 쉴 새 없이 쏘아 올리고 있었다. 악마의 군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산길을 가득 메운 채 진군을 계속했다.
전장의 한가운데서 가혹한 감독관 쉔크가 가시 달린 채찍을 휘두르며 하수인들을 잔혹하게 독려하고 있었다. 그의 거대하고 흉측한 몸집은 전장의 공포 그 자체였으며, 채찍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끔찍한 파열음이 울렸다. 쉔크는 영웅을 발견하고는 기괴한 웃음을 터뜨리며 돌진했다.
영웅과 쉔크의 치열한 전투가 눈 덮인 언덕 위에서 시작되었다. 쉔크의 거대한 채찍이 눈보라를 가르며 날아왔고, 영웅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숙여 치명적인 일격을 피했다. 무기와 마법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고, 주변의 하수인들마저 그 여파로 튕겨 나갔다.
쉔크는 고통을 모르는 짐승처럼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영웅의 침착하고 예리한 반격에 점차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검은 피가 눈밭을 얼룩지게 했고, 쉔크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다. 영웅은 적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모든 힘을 끌어모아 쉔크의 급소를 향해 무기를 찔러넣었다.
치명상을 입은 쉔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몸을 휘청거렸다. 그의 몸집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억눌려 있던 폭발적인 에너지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며 강렬한 빛을 번쩍였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악마 하수인들마저 그 끔찍한 폭발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재로 변해버렸다.
쉔크를 쓰러뜨린 영웅은 전장 깊숙한 곳에서 날카로운 나무창으로 둘러싸인 조잡한 감옥들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바알의 군대에게 사로잡혀 끔찍한 고문을 당하던 야만용사 전사들이 갇혀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그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꺾이지 않은 투지가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영웅은 단숨에 감옥의 문을 부수고 갇혀 있던 전사들을 해방시켰다. 족쇄를 푼 야만용사들은 영웅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땅에 떨어진 무기를 주워 들고 복수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악마들의 포위망을 뚫고 하로가스로 돌아가 다시 방벽을 지키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다.
구출된 전사들이 무사히 하로가스로 귀환하자, 굳게 닫혀 있던 퀄케크의 마음도 마침내 열렸다. 그는 영웅의 용기와 힘을 진심으로 인정하며, 자신의 가장 뛰어난 부하들을 기꺼이 영웅의 곁에 내어주었다. 하로가스의 주민들은 비로소 이 이방인에게서 진정한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안야 구출과 니흘라탁의 치명적인 배신

영웅이 마을로 돌아오자 말라가 주위를 살피며 은밀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장로의 딸 안야가 며칠 전부터 실종되었으며, 니흘라탁이 이 일에 깊이 관여되어 있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털어놓았다. 말라는 영웅의 손을 간절히 붙잡으며 얼어붙은 강을 수색해 안야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영웅은 말라의 부탁을 받고 뼛속까지 시린 혹한을 뚫고 얼어붙은 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정처럼 빛나는 얼음 동굴 안에는 흉포한 웬디고와 얼음 괴물들이 침입자를 노리며 숨어 있었다. 영웅은 매복한 괴물들의 맹공을 물리치며 미끄러운 빙판길을 따라 동굴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동굴의 가장 깊은 곳, 거대한 얼음기둥 한가운데에 갇혀 있는 안야를 마침내 발견했다. 그녀의 몸은 마법적인 얼음에 꽁꽁 묶여 있었고, 창백해진 입술 사이로 고통스러운 신음만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영웅이 무기로 얼음을 깨려 했지만, 니흘라탁의 저주받은 마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영웅은 서둘러 마을로 돌아가 말라에게 상황을 전했고, 말라는 자신이 직접 조제한 강력한 해빙 물약을 건네주었다. 다시 얼어붙은 강으로 돌아온 영웅이 물약을 얼음기둥에 붓자, 기괴한 소리와 함께 마법이 풀려났다. 안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차가운 바닥으로 쓰러지듯 풀려났다.
기력을 회복한 안야는 떨리는 목소리로 니흘라탁의 끔찍한 배신을 폭로했다. 그가 하로가스를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바알과 은밀히 거래를 맺었고, 반대하는 자신을 이 얼음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안야의 눈동자에는 배신자를 향한 분노와 고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교차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니흘라탁이 고대인의 유물인 장로의 유물을 바알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이었다. 그 유물로 인해 바알은 고대인의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아리앗 산의 방벽을 우회하여 세계석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성역의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허무하게 뚫려버린 것이다.
안야가 영웅의 부축을 받으며 하로가스로 생환하자, 마을 광장은 엄청난 충격과 분노로 들끓었다. 자신의 죄악이 탄로 났음을 깨달은 니흘라탁은 이미 비겁하게 마을을 빠져나가 고통의 전당으로 도망친 후였다. 주민들은 배신자의 이름을 저주하며 영웅에게 그를 처단해 달라고 간청했다.
영웅은 안야가 열어준 차원문을 통해 니흘라탁이 숨어 있는 어두운 사원으로 진입했다. 언데드 군대를 소환하며 저항하던 니흘라탁은 결국 영웅의 압도적인 힘 앞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배신자를 처단한 영웅은 지체 없이 바알의 발자취를 쫓아 아리앗 산의 정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리앗 산 정상의 세 고대인과 시험

아리앗 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한 수정 통로와 빙하의 길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고대 얼음 속에 갇혀 있던 악마들이 깨어나 영웅의 앞길을 가로막았고, 날카로운 고드름이 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영웅은 살을 에이는 추위와 악마들의 피비린내 속을 묵묵히 뚫고 전진했다.
길고 고통스러운 산행 끝에 영웅은 마침내 아리앗 산의 정상에 자리 잡은 고대인의 길에 도달했다. 구름 위로 솟아오른 웅장한 제단 주변에는 성역의 역사를 지켜온 신성한 기운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거센 바람 소리만이 텅 빈 정상의 고요함을 깨며 영웅의 귓가를 맴돌았다.
제단 중앙에는 전설적인 세 명의 네팔렘, 탈릭, 콜릭, 마도크의 거대한 동상이 위엄 있게 서 있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세계석으로 향하는 문을 지키며 자격 없는 자들의 출입을 막아온 아리앗의 선조들이었다. 동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백이 영웅의 숨통을 조여왔다.
영웅이 천상의 제단에 손을 얹고 고대인의 의례를 시작하자,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며 동상들이 생명을 얻었다. 돌 껍질을 깨고 일어난 세 명의 선조들은 황금빛 투기를 뿜어내며 영웅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그들의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산 정상을 흔들며 시험의 시작을 알렸다.
영웅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치열한 사투가 구름 덮인 산 정상에서 벌어졌다. 탈릭의 회오리바람이 눈보라를 가르며 덮쳐왔고, 콜릭은 거대한 미늘창을 들고 공중에서 무서운 속도로 도약 공격을 감행했다. 마도크의 날카로운 도끼가 사각지대를 파고들며 영웅을 극한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세 명의 고대인이 펼치는 완벽한 협공에 영웅은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영웅은 결코 물러서지 않고, 그동안 겪어온 수많은 전투의 경험을 살려 적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을 가했다. 피와 땀이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도 영웅의 투지는 오히려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맹렬한 전투가 정점에 달한 순간, 마침내 세 고대인이 동시에 무기를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영웅의 강인한 의지와 뛰어난 무력을 진심으로 인정하며, 황금빛 동상으로 다시 굳어지기 전 깊은 경의를 표했다. 아리앗의 선조들이 마침내 영웅에게 세계석으로 향할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굳게 닫혀 있던 세계석 성채의 거대한 철문이 육중한 마찰음을 내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선조들의 영혼은 바알이 이미 유물을 이용해 성채 내부로 침투했음을 경고하며 성역의 운명을 영웅에게 탁초했다. 영웅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어둠이 도사린 성채 내부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세계석 보관실과 바알의 끔찍한 오염

세계석 성채 내부는 이미 바알의 끔찍한 타락으로 인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대리석 벽을 타고 끈적한 악마의 핏줄기가 흘러내렸고, 공기 중에는 숨을 들이쉬기조차 힘든 맹독의 기운이 가득했다. 영웅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악마들의 붉은 눈동자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성채 깊숙한 파괴의 왕좌에 도달하자, 바알이 소환한 지옥의 하수인들이 차례로 밀려들었다. 몰락자 마술사 콜렌조, 언데드 마법사 아크멜, 피의 바르투크가 이끄는 의회원들, 그리고 지옥의 베놈 로드 벤타르 등 강력한 악마 무리가 영웅을 갈기갈기 찢기 위해 덤벼들었다. 영웅은 피로 물든 무기를 쉴 새 없이 휘두르며 파괴의 군주가 내세운 군대를 하나씩 척결해 나갔다.
바알은 왕좌에 거만하게 앉아 영웅이 하수인들과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며 기괴한 조소를 터뜨렸다. 그는 끔찍한 환영과 저주를 쏟아내며 영웅의 정신을 갉아먹으려 했지만, 영웅의 굳건한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바알의 웃음소리가 멎을 때마다 왕좌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침내 가장 강력한 하수인인 미니언 오브 디스트럭션 무리가 영웅의 발밑에 쓰러졌다. 거대한 공룡 형태의 악마들이 단말마를 내지르며 죽어가자, 바알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영웅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한 채 등 뒤의 포털을 열고 세계석 보관실로 도망쳤다.
영웅은 지체 없이 바알이 열어둔 핏빛 포털에 몸을 던져 세계석 보관실로 바짝 추격했다. 포털 너머의 공간은 성역의 물리 법칙이 무너진 듯 기괴하고 몽환적인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영웅은 무기를 고쳐 쥐고 성역의 심장부에서 기다리고 있을 파괴의 군주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보관실 중앙에는 거대한 산맥만큼이나 거대한 수정, 세계석이 허공에 떠서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천상과 지옥의 눈을 피해 성역을 창조하고 인간의 잠재력을 억제해 온 태초의 유물이었다. 영웅은 그 압도적인 크기와 웅장함에 잠시 숨을 멈추고 세계석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경외감도 잠시, 거대한 수정의 표면은 이미 바알이 퍼뜨린 붉고 검은 촉수로 끔찍하게 뒤덮여 있었다. 타락의 에너지가 맥박 치듯 세계석의 심장부로 스며들고 있었고, 맑았던 빛은 탁한 핏빛으로 변질되어 갔다. 성역 전체를 오염시킬 파멸의 씨앗이 이미 깊숙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바알은 세계석에 자신의 타락한 기운을 주입하며 영웅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등 뒤로 뻗어 나온 거미 같은 다리들이 허공을 위협적으로 휘저었고, 파괴의 군주가 내뿜는 살기가 보관실 전체를 짓눌렀다. 성역의 운명을 결정지을 최후의 결전이 타락해 가는 세계석 앞에서 막을 올렸다.
파괴의 군주 바알과의 최후의 결전

파괴의 군주 바알과의 최종 결전은 그야말로 지옥의 풍경을 방불케 했다. 바알이 손을 휘두르자 공간이 찢어지며 파괴적인 마법의 파동이 영웅을 향해 맹렬하게 쏟아졌다. 영웅은 바닥을 구르며 치명적인 공격을 피하고, 틈을 타 바알의 흉측한 육신을 향해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위기에 몰린 바알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환영 분신을 소환하여 영웅의 시야를 교란시켰다. 두 명의 바알이 동시에 강력한 마법을 쏟아내자 보관실 전체가 폭발음으로 진동하며 무너져 내릴 듯 흔들렸다. 영웅은 빗발치는 공격 속에서 진짜 바알을 찾아내기 위해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바닥에서는 맹독을 품은 악마의 촉수들이 쉴 새 없이 솟아올라 영웅의 발목을 노렸다. 바알이 뿜어내는 얼어붙는 파동에 맞은 영웅은 몸이 굳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결코 무기를 놓지 않았다. 세계석이 뿜어내는 핏빛 섬광 아래서 영웅과 악마의 처절한 사투가 끝없이 이어졌다.
영웅은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견뎌내며 바알의 공격 패턴을 간파해 냈다. 분신이 흩어지는 찰나의 순간, 영웅은 모든 기력을 쥐어짜 내어 바알의 본체를 향해 번개처럼 쇄도했다. 영웅의 무기가 바알의 두꺼운 장갑을 뚫고 파괴의 군주의 심장 깊숙한 곳에 치명타를 꽂아 넣었다.
바알의 입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치명상을 입은 그의 육신은 더 이상 파괴의 에너지를 통제하지 못한 채 기괴하게 부풀어 오르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검은 피와 맹독이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바알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바닥으로 처참하게 쓰러졌다.
통제를 잃은 파괴의 에너지가 폭주하며 바알의 몸이 눈부신 빛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끔찍한 폭발이 보관실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대악마의 잔해만이 검은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영웅은 피투성이가 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알이 완전히 소멸했음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메피스토와 디아블로에 이어, 마침내 마지막 남은 대악마인 파괴의 군주 바알마저 영웅의 발밑에 쓰러졌다. 기나긴 악몽 같았던 지옥의 침략을 막아낸 영웅의 얼굴에는 승리의 환희보다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하지만 이 위대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보관실 내부의 불길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웅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다시금 절망을 불러일으켰다. 바알은 죽었지만, 그가 세계석에 주입한 타락의 촉수들은 멈추지 않고 수정의 심장부를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성역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이겼으나, 성역의 근원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었다.
티리엘의 강림과 돌이킬 수 없는 오염

그때 허공에서 눈부신 천상의 빛이 번쩍이며 대천사 티리엘이 보관실 한가운데로 강림했다. 그의 거대한 빛의 날개가 어두운 공간을 환하게 밝혔고, 웅장한 기운이 주변의 악한 기운을 밀어냈다. 티리엘은 쓰러진 바알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영웅이 이룩한 위대한 승리를 진심으로 칭송했다.
대천사는 필멸자의 몸으로 세 명의 대악마를 모두 물리친 영웅의 용기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 지옥의 군주들이 모두 패배함으로써 성역은 마침내 영원한 파멸의 위기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티리엘의 칭찬을 들은 영웅은 무거운 무기를 내려놓으며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했다.
그러나 티리엘의 시선이 붉게 물들어가는 거대한 세계석으로 향하자, 대천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후드 너머로 짙은 절망이 드리워졌다. 빛의 날개가 불안하게 흔들렸고, 보관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티리엘은 침통한 걸음으로 다가가 오염된 수정의 표면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티리엘은 세계석의 심장부까지 뻗어 내린 바알의 타락을 가늠하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파괴의 군주가 남긴 독기는 이미 성역의 근본적인 구조를 뒤틀어놓을 만큼 치명적으로 퍼져 있었다. 대천사의 힘으로도 이 거대한 오염을 정화하거나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절망적인 판가름이 내려졌다.
세계석이 이대로 부패하게 둔다면, 지옥의 기운이 성역 전체로 퍼져나가 모든 생명체를 악마로 변이시킬 것이 자명했다. 인간의 영혼은 타락하고 세상은 지옥의 영원한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티리엘은 천상과 성역의 법도를 뛰어넘는, 참담하고도 극단적인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티리엘은 영웅을 향해 돌아서며 무겁고 단호한 목소리로 청천벽력 같은 진실을 전했다. 지옥의 완전한 침략을 막고 성역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미 오염된 세계석을 완전히 파괴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역이 창조된 이래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끔찍한 선택이었다.
영웅은 세계석이 파괴되면 성역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묻는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대천사를 바라보았다. 티리엘은 자신조차 그 결과를 알 수 없으며,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무거운 경고를 남겼다. 하지만 이대로 멸망을 기다릴 수는 없기에, 그는 기꺼이 파괴자의 오명을 쓰기로 했다.
티리엘은 영웅에게 붉은 차원문을 열어주며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것을 지시했다. 영웅은 성역의 운명을 결정지을 대천사의 숭고하고도 비극적인 결단 앞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은 마지막으로 타락한 세계석을 뒤돌아보고는 포털 너머 하로가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계석 파괴와 새로운 시대의 서막

영웅이 무거운 마음으로 포털을 타고 하로가스 광장으로 귀환하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승리의 소식을 물었다. 영웅은 바알이 쓰러졌음을 알렸지만, 표정에는 기쁨 대신 다가올 거대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퀄케크와 말라는 영웅의 침묵 속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직감했다.
같은 시각, 세계석 보관실에 홀로 남은 티리엘은 거대한 타락의 수정 앞에 우뚝 섰다. 그는 천상의 정의를 상징하는 자신의 검 엘드루인을 천천히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대천사의 결연한 의지와 함께 엘드루인의 칼날 위로 눈이 멀 듯한 순백의 에너지가 폭풍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천상의 빛이 검 끝에 응집되며 어둡고 탁해진 보관실 전체를 눈부시게 밝혀나갔다. 티리엘은 성역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 금기를 깨는 고통을 감내하며, 검에 깃든 에너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의 등 뒤로 펼쳐진 빛의 날개가 거대한 파동을 일으키며 세계석의 타락한 기운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티리엘은 온 힘을 다해 눈부시게 빛나는 엘드루인을 타락한 세계석의 중심을 향해 강하게 던졌다. 천상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수정의 심장부를 깊숙이 꿰뚫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기나긴 정적이 보관실을 감돌았다. 이내 세계석 내부에서부터 억눌려 있던 엄청난 에너지가 임계점을 돌파하며 눈부시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고막을 찢는 듯한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성역을 지탱해 온 거대한 세계석이 수만 개의 파편으로 산산조각 났다. 타락의 기운과 천상의 빛이 뒤엉켜 폭주하며 보관실의 벽을 허물고 밖으로 뿜어져 나갔다. 티리엘의 형체마저 그 압도적인 빛의 폭풍 속으로 흔적도 없이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다.
아리앗 산 정상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하늘로 솟구치며 끔찍한 대폭발이 일어났다. 수천 년 동안 눈 덮인 위용을 자랑하던 아리앗 산의 상층부가 화산이 폭발하듯 맹렬하게 붕괴하며 하늘이 붉게 갈라졌다. 거대한 산맥이 무너져 내리는 진동이 하로가스는 물론 성역 전체를 뒤흔들었다.
하로가스의 주민들과 영웅은 광장에 서서 자신들의 영산이 무너져 내리는 끔찍하고도 경이로운 광경을 지켜보았다. 야만용사들은 고향의 상실에 슬퍼하면서도, 지옥의 위협이 끝났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영웅은 쏟아지는 불길 속에서 티리엘의 희생과 성역의 미래를 묵묵히 기원했다.
수천 년 동안 인류를 억제하고 보호해 온 세계석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성역은 영원히 변해버렸다. 천상과 지옥의 눈을 가려주던 장막이 걷혔고, 인간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네팔렘의 힘이 다시 눈을 뜰 준비를 마쳤다. 미지의 위험과 새로운 희망이 공존하는 시대가 잿빛 하늘 아래 막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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