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연대기 16화 · 성채의 불빛이 꺼지는 순간
이 글의 목차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아즈모단의 군대가 철벽의 성채를 포위

철벽의 성채 위로 핏빛 잿가루가 눈처럼 내렸다. 아즈모단의 군대가 쏘아 올린 지옥불의 잔해였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끝을 알 수 없는 악마의 군단이 성벽을 향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매캐한 유황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무기를 쥔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만이 무거운 침묵을 채우고 있었다.
저 멀리 투석기가 바위를 날려 보내는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죄악의 군주 아즈모단은 거대한 환영을 허공에 띄워 방어군을 조롱했다. 그의 오만한 목소리가 성채의 돌벽을 타고 흐르자, 젊은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방패 뒤로 몸을 웅크렸다. 절망이 전염병처럼 성벽 위를 맴돌고 있었다.
네팔렘은 굳은 표정으로 최전선에 서서 지옥의 군세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전투를 겪어온 영웅의 눈에도 아즈모단의 병력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이 성채가 무너지면 성역 전체가 짓밟힐 것이 자명했기에, 영웅은 무기를 고쳐 쥐며 다가올 혈투를 조용히 준비했다.
밧줄과 갈고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흉측한 마수들이 성벽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발톱이 돌벽을 긁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지휘관이 목청껏 화살을 쏘라 외쳤고, 빗발치는 화살촉이 악마들의 가죽에 꽂혔지만 미친듯한 진격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첫 방어선이 거세게 흔들렸다.
날개 달린 거대한 악마 하나가 강하하더니 비명을 지르는 병사를 낚아채어 심연으로 던져버렸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끔찍한 비명은 남은 이들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아비규환 속에서, 네팔렘은 망설임 없이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무기가 번쩍이며 악마의 목을 베었다.
영웅이 뿜어내는 강력한 힘은 벼락처럼 전열을 휩쓸며 악마들의 공세를 잠시 늦추었다. 네팔렘의 등 뒤로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다시 창을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며 반격했다. 피와 땀이 얼어붙은 성벽 위에서 인간과 악마의 처절한 난전이 벌어졌다. 누구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끔찍한 소모전의 시작이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들을 베어 넘길 때마다 네팔렘의 팔에도 묵직한 피로가 쌓여갔다. 하지만 아즈모단의 환영은 여전히 하늘에서 그들의 발버둥을 비웃고 있었다. 영웅은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부상당한 병사를 등 뒤로 끌어당겼다. 자신이 쓰러지면 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핏물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성벽 위에서 네팔렘은 다시 무기를 크게 휘둘러 길을 열었다. 찢겨나간 악마의 시체들이 산처럼 쌓였지만, 지평선 너머로는 여전히 검은 군대가 밀려오고 있었다. 철벽의 성채는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고, 영웅은 이 포위망을 뚫을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함을 직감했다.
영웅과 병사들이 성벽·지하에서 끝없는 공세를 막음

전투의 양상은 높은 성벽에서 멈추지 않고 성채의 깊은 지하 공간까지 번져갔다. 방어벽의 갈라진 틈을 타고 스며든 악마들은 지하 저장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네팔렘은 성벽의 방어를 병사들에게 맡긴 채 어둡고 습한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횃불마저 꺼진 통로에는 기분 나쁜 악취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식량 저장고 깊은 곳에서 탐식의 군주 그홈의 하수인들이 뿜어내는 맹독 가스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란빛을 띠는 독 안개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폐를 찢는 고통을 주었다. 방독 장비 없이 내몰린 병사들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네팔렘은 독기를 뚫고 들어가 퇴로를 확보해야만 했다.
영웅은 호흡을 최소화한 채 맹독의 안개 속으로 돌진하여 부풀어 오른 악마들을 향해 무기를 내리쳤다. 살덩이가 터져 나가며 더욱 지독한 악취가 뿜어져 나왔지만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폐쇄된 지하 통로에서 영웅이 뿜어내는 마력은 유일한 희망의 이정표가 되어 어둠 속을 헤매는 생존자들을 이끌었다.
부러진 창을 쥐고 벽에 기대어 헐떡이던 젊은 경비병은, 눈앞에서 악마들을 도륙하는 네팔렘의 무위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공포에 질려 다리를 떨던 그는 영웅이 내미는 손을 잡고 간신히 일어섰다. 네팔렘은 생존자들을 독려하며 부서진 철문을 바리케이드 삼아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단호히 명령했다.
병사들이 무거운 나무통과 돌무더기를 끌어와 통로를 막는 동안, 네팔렘은 홀로 좁은 길목에 서서 쏟아지는 괴물들의 파도를 막아냈다. 검붉은 피가 영웅의 갑옷을 적시고 바닥을 미끄럽게 만들었지만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영웅의 결연한 뒷모습은 절망에 빠진 병사들의 투지를 다시 불타오르게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직 본능과 감각에 의존해 무기를 휘두르는 시간은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네팔렘의 숨소리도 점차 거칠어지고 있었지만, 지하를 점령하려던 악마들의 기세도 마침내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셀 수조차 없이 많은 괴물의 사체가 널브러져 끔찍한 무덤을 형성했다.
마지막 남은 덩치 큰 악마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쓰러지자, 지하 통로에는 마침내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독가스도 흩어지며 희미한 횃불 빛이 공간을 다시 밝혔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으나, 네팔렘은 무기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묵묵히 다음 끔찍한 전투를 준비했다.
지상과 지하를 오가며 끝없는 방어전을 치르는 사이, 네팔렘의 내면에는 묘한 불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즈모단의 군대는 집요했고 성채의 방어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영웅은 성채 중심부에서 검은 영혼석을 억누르고 있을 레아의 안위를 떠올리며, 서둘러 적의 심장부를 타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레아가 검은 영혼석 속 악마를 억누르며 지쳐감

철벽의 성채에서 가장 깊고 안전한 밀실, 레아는 차가운 돌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불길한 붉은빛을 뿜어내는 검은 영혼석이 떠서 요동쳤다. 영혼석 내부에서는 벨리알을 비롯해 이미 봉인된 대악마들의 원혼들이 끊임없이 속삭이며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레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창백해진 두 손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력에 맞서듯 허공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녀가 지닌 타고난 마력만이 악마들이 현실로 튀어나오는 것을 막아내는 유일한 족쇄였다. 하지만 일곱 악마 중 여섯의 영혼이 뿜어내는 사악한 기운은 평범한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거대했다.
귓가를 맴도는 악마들의 저주는 레아의 가장 깊은 공포와 의심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술이 터져 비릿한 피 맛이 번졌지만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영혼석에서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이 그녀의 팔을 휘감으려 요동쳤다.
아드리아는 방 한구석에 서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딸을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어머니로서의 애틋함이나 걱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냉혹한 관찰자의 계산만이 서려 있었다. 아드리아는 천천히 다가와 레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속을 알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내 사랑하는 딸아. 너의 그 특별한 힘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열쇠란다. 아드리아의 속삭임은 묘하게도 레아의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더욱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을 안겨주었다. 레아는 어머니의 말을 믿고 싶었지만, 영혼석과 연결될수록 영혼마저 검게 물들어가는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시야가 점차 흐려지고 손끝의 감각이 마비되어 가는 와중에도 레아는 억제 마법의 결계를 다시금 단단히 엮어냈다. 그녀는 데커드 케인이 남긴 가르침과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네팔렘의 노력도 모두 끝이라는 생각에 남은 생명력마저 쥐어짜 내어 영혼석을 짓눌렀다.
네팔렘이 잠시 밀실에 들러 참혹하게 지쳐가는 레아의 모습을 목격했다. 영웅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쉬게 하고 싶었지만, 밖에서는 아즈모단의 군대가 성벽을 부수고 있었다. 레아는 억지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은 괜찮으니 어서 전장으로 돌아가라 손짓했다. 그 처절한 희생의 무게에 네팔렘은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문이 닫히고 다시 짙은 어둠이 밀실을 채우자, 레아는 참았던 고통의 신음을 토해내며 바닥으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영혼석은 그녀의 약해진 틈을 타 더욱 거세게 붉은빛을 명멸하며 요동쳤다. 아드리아는 쓰러진 딸을 부축하는 대신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영혼석을 응시하며, 다가올 거대한 계획의 마지막 단계를 조용히 그렸다.
티리엘이 인간의 몸으로 전쟁과 신뢰를 배우는 모습

무기고 한편에서 티리엘은 평범한 강철 검을 쥔 채 자신의 양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천사의 불멸하는 육신을 버리고 필멸자가 된 이후, 검을 쥐는 것조차 예전 같지 않았다. 거친 자루에 쓸린 손바닥에서는 붉은 피가 배어 나왔고, 상처가 주는 쓰라린 고통은 그가 이제 나약한 인간이 되었음을 상기시켰다.
찬 바람이 무기고의 틈새로 스며들자 티리엘은 무심코 몸을 떨었다. 빛의 날개로 온기를 품던 시절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뼛속까지 시린 추위였다. 그는 얇은 천과 가죽 갑옷에 의지한 채 공포와 추위에 떨고 있는 인간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나약한 존재들이 압도적인 악마의 군세 앞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 늙은 경비대장이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와 티리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말없이 품에서 딱딱하게 굳은 빵 한 조각과 온기가 남은 물통을 꺼내어 내밀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전장 한가운데서 필멸자들이 나눌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도 진실한 연대의 표시였다. 티리엘은 망설이다 두 손으로 식량을 받아들었다.
미지근한 물이 마른 목을 타고 넘어가자, 티리엘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따뜻함이 피어올랐다. 천상의 완벽한 질서 속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한, 불완전하고 상처 입은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만들어내는 강인함이었다. 그는 빵을 씹으며 인간들이 지닌 진정한 힘이 마법이나 무력에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싸우지만, 결코 혼자서 죽지는 않을 거요. 늙은 대장은 피 묻은 붕대를 매만지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에는 두려움 너머의 숭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티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천상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나약하고도 아름다운 종족의 곁에 서기로 한 선택을 확신했다.
티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에 묻은 핏자국을 천으로 닦아냈다. 정의의 대천사로서 수많은 악마를 심판했던 그였지만, 지금 쥐고 있는 이 평범한 강철 검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하늘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방관자가 아니었다. 피 흘리고 고통받으며 함께 구르는 필멸자 전사였다.
네팔렘이 적의 심장부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티리엘은 병사들을 규합하여 방어선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나섰다. 그의 목소리에는 천사의 권위 대신 전우를 향한 깊은 신뢰와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병사들은 비록 그가 날개를 잃었음에도, 여전히 곁에서 함께 싸우는 진정한 영웅임을 인정하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성채의 문이 다시 열리고 악마들의 새로운 공세가 시작되자, 티리엘은 가장 먼저 앞장서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인간의 몸이 겪는 피로와 고통이 온몸을 짓눌렀지만, 등 뒤에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전우들의 함성이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필멸자 티리엘은 신뢰와 연대라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무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영웅이 아즈모단의 군세를 뚫고 죄악의 군주를 쓰러뜨림

네팔렘은 아즈모단의 군대가 쏟아져 나오는 진원지, 아리앗 분화구의 심연으로 거침없이 하강했다. 사방에서 끓어오르는 용암의 열기와 부패한 악취가 숨통을 조여왔지만 영웅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죄악의 심장부를 파괴하고 적의 본대를 궤멸시키지 않는 한, 철벽의 성채가 맞이할 운명은 처참한 몰락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화구 깊은 곳에서 욕정의 여제 키데아가 흉측한 거미줄을 치고 영웅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녀는 달콤하고 독기 어린 목소리로 네팔렘의 정신을 흩뜨리려 했으나, 분노로 타오르는 영웅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맹렬한 전투 끝에 키데아의 기괴한 몸뚱이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녀가 낳은 수많은 맹독 거미들 역시 재로 변해버렸다.
마침내 아리앗의 중심부에 자리한 거대한 문이 부서지며, 끔찍한 위용을 자랑하는 죄악의 군주 아즈모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짐승의 하반신과 흉측하게 부풀어 오른 상반신을 지닌 그는 오만한 웃음을 터뜨리며 네팔렘의 무모함을 조롱했다. 지옥의 화염이 끓어오르는 원형의 투기장 속에서 성역의 운명을 건 마지막 결전의 막이 올랐다.
아즈모단은 거대한 손을 휘두르며 하늘에서 파괴적인 지옥불 운석들을 비처럼 쏟아부었다. 바닥은 붉게 달아올랐고 피할 곳 없는 좁은 공간 속에서 죽음의 구체들이 사방을 휩쓸었다. 하지만 네팔렘은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불길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영웅의 무기가 아즈모단의 두꺼운 갑각을 강타하며 불꽃을 튀겼다.
당황한 죄악의 군주는 어둠의 웅덩이를 소환하여 영웅의 발을 묶고 생명력을 흡수하려 발버둥 쳤다. 부패한 기운이 네팔렘의 발목을 휘감으며 살을 썩어 들어가게 했지만 영웅은 고통을 악물고 내면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눈부신 마력의 폭발이 웅덩이를 찢어발겼고, 그 반동으로 아즈모단의 거대한 몸집이 크게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승기를 잡은 네팔렘은 벼락같은 속도로 도약하여 아즈모단의 심장부를 향해 치명적인 일격을 꽂아 넣었다. 두꺼운 가죽과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투기장에 끔찍하게 울려 퍼졌다. 아즈모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며 고통 섞인 단말마를 내질렀다.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던 어둠의 에너지가 통제를 잃고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아즈모단의 육신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죄악의 군주는 끝까지 저주를 퍼부으려 했으나 그의 형체는 이미 빛을 잃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폭발하는 지옥의 에너지가 사방을 휩쓰는 가운데, 아즈모단의 본질을 담은 검고 붉은 영혼의 정수가 허공으로 뜯겨 나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성채 방향으로 날아갔다.
아즈모단이 쓰러지자 아리앗 분화구를 채우던 악마들의 기운도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지독한 유황 냄새가 걷히고 용암의 열기도 잦아들었다. 네팔렘은 거친 숨을 고르며 마침내 성역을 위협하던 거대한 악의 군세를 물리쳤음을 실감했다. 영웅은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지쳐있을 레아를 구하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돌려 철벽의 성채로 귀환했다.
성채로 돌아오자 아드리아가 배신하고 레아의 혈연을 공개

아즈모단을 꺾은 네팔렘이 철벽의 성채로 돌아왔을 때, 영웅을 맞이한 것은 승리의 환호성이 아니라 소름 끼치는 죽음의 정적이었다. 무기고로 향하는 복도에는 방어전을 버텨냈던 병사들의 시신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핏물은 아직 따뜻했고, 적의 습격이 아닌 내부에서 벌어진 일방적인 학살의 흔적이 역력했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네팔렘이 레아가 머물던 중앙 밀실로 다급히 뛰어들었다. 방 안의 광경은 영웅의 피를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티리엘은 핏빛 마법진에 포박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의 한가운데에는 쓰러진 레아를 내려다보며 검은 영혼석을 쥐고 있는 아드리아가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요, 아드리아! 마법의 결박을 풀려 안간힘을 쓰던 티리엘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일갈했다. 필멸자의 한계에 부딪힌 그의 외침은 밀실의 벽을 치고 허망하게 흩어졌다. 아드리아는 포박당한 대천사를 비웃듯 차갑게 내려다보며 검은 영혼석을 가슴 품으로 끌어당겼다. 영혼석 안에는 이제 일곱 악마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이 나약한 세상을 구원하려 한 적이 없다. 아드리아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뱀처럼 교활하고 섬뜩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오직 오랜 세월 품어온 광신적인 목적만이 번뜩였다. 그녀가 모성의 실수로 악에 굴복한 것이 아님이 명백해졌다. 처음부터 그녀는 단 하나의 진정한 주인을 위해 모든 것을 철저히 기만해 온 것이다.
네팔렘이 무기를 뽑아 들고 당장이라도 아드리아의 목을 치려 달려들었으나, 핏빛 장막이 솟아오르며 앞을 가로막았다. 아드리아는 쓰러진 레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잔혹한 진실을 입에 담았다. 트리스트럼의 어둠의 방랑자, 아이단 왕자가 바로 이 아이의 아버지다. 내 딸은 태어날 때부터 디아블로 님의 핏줄을 이어받은 완벽한 그릇이었다.
끔찍한 혈연의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 밀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이단 왕자가 디아블로의 숙주가 되어 타락했던 그 밤, 아드리아는 대악마의 씨앗을 잉태하여 훗날을 도모했던 것이다. 레아가 지녔던 그 강력하고 통제하기 힘들었던 힘의 원천은 빛이 아니라, 뼛속 깊이 새겨진 대악마의 저주받은 유산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당신은 처음부터 레아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우리 모두를 이용했군! 네팔렘이 분노로 치를 떨며 장막을 부수려 무기를 내리쳤지만 흑마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드리아는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바로 그 뜻이다. 일곱 악마를 하나의 영혼석에 모으고 가장 완벽한 혈통의 육신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나의 유일한 사명이었다.
배신의 충격과 절망이 방 안을 짓누르는 가운데, 기절해 있던 레아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차가운 얼굴과, 그 손에 들린 불길한 영혼석을 마주한 레아의 눈동자에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운명이 무력한 소녀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아이단을 통해 디아블로의 딸이 된 레아와 검은 영혼석의 일곱 악

어머니...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레아의 떨리는 목소리가 밀실의 적막을 갈랐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악마들을 억눌렀던 그녀의 정신은 유일하게 믿었던 혈육의 잔혹한 배신 앞에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방울에는 자신이 겪어온 모든 고난과 희생이 철저한 거짓이었다는 처절한 절망이 담겨 있었다.
아드리아는 딸의 애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모성애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너는 이 위대한 순간을 위해 태어난 도구일 뿐이다, 레아. 칠흑 같은 어둠이 너를 통해 완성될 것이다. 냉혹한 선고와 함께 아드리아는 일곱 악마의 기운으로 붉게 끓어오르는 검은 영혼석을 높이 치켜들었다. 파멸의 의식이 시작되었다.
아드리아는 자비 없이 어둠의 주문을 외우며 검은 영혼석의 마력을 해방했다. 영혼석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 같은 사악한 에너지가 촉수처럼 뻗어 나와 레아의 온몸을 휘감고 그녀의 심장 깊숙한 곳으로 강제로 흘러들었다. 레아의 입에서 인간이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끔찍하고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며 허공으로 떠올랐고 핏빛 번개가 휩쓸었다.
영혼석에 갇혀 있던 일곱 악마의 사악한 정수가 폭포수처럼 레아의 혈관을 타고 흘러들었다. 아이단 왕자의 핏줄에 숨죽여 있던 디아블로의 유산이 그 힘을 흡수하며 폭발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했다. 레아의 인간적인 의식은 거대한 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고, 맑았던 두 눈은 지옥의 화염을 품은 끔찍한 붉은빛으로 타올랐다.
안 돼! 레아를 놔둬라! 네팔렘이 피투성이가 된 주먹으로 마법 장막을 미친 듯이 두드렸지만, 부서지는 것은 영웅의 뼈와 살점뿐이었다. 장막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변이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레아의 고운 피부가 잿빛으로 썩어 들어가며 갈라졌고, 뼈마디가 기괴하게 비틀리며 흉측한 악마의 골격으로 재구성되었다.
밀실의 그림자 속에서 과거 트리스트럼을 구원하려다 스스로 파멸을 맞이했던 아이단 왕자의 비극적인 환영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아버지가 짊어졌던 저주받은 운명이 세대를 넘어 딸에게 고스란히 덧씌워지는 잔혹한 광경이었다. 레아의 등에서 거대한 가시뼈가 솟아오르고, 입에서는 여러 악마의 목소리가 뒤섞인 기괴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티리엘은 고개를 떨군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천상의 지혜로도 이토록 치밀한 악의 안배를 꿰뚫어 보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이 뼈에 사무치도록 원망스러웠다. 희망을 상징하던 소녀가 가장 끔찍한 절망의 화신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필멸자 티리엘의 가슴 속에는 천사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죄책감과 슬픔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침내 레아의 비명이 잦아들고,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는 소리만이 방 안을 소름 끼치게 채웠다. 아드리아는 뒷걸음질 치며 자신이 창조해낸 끔찍한 결과물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인간 소녀 레아의 존재는 이제 세상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일곱 악마의 힘을 모두 집어삼킨 거대한 공포의 군주만이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레아의 몸을 빼앗은 대악마 디아블로가 천상으로 향함

찢겨나간 레아의 허물 위로, 지옥의 화염과 짙은 어둠을 두른 거대한 실루엣이 몸을 일으켰다. 일곱 대악마의 모든 권능을 하나로 흡수한 절대적인 존재, 대악마 디아블로가 마침내 성역에 강림한 것이다. 놈의 숨결 한 번에 밀실의 돌벽이 녹아내렸고,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공포의 기운은 숨을 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공간을 짓눌렀다.
디아블로가 불타오르는 두 눈을 번쩍이자 방 안의 모든 빛이 일순간에 사그라들고 오직 핏빛 화염만이 일렁였다. 티리엘은 억눌린 신음을 토해내며 바닥에 엎드렸다. 대천사의 영혼을 지닌 그조차도 지금 눈앞에 강림한 대악마의 기운 앞에서는 본능적인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과거 상대했던 어떤 악마와도 비교할 수 없는 파멸의 결정체였다.
위대한 주인이시여. 제가 당신의 그릇을 준비하였나이다. 아드리아가 피투성이가 된 바닥에 엎드려 광기 어린 목소리로 칭송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디아블로는 자신의 충실한 하수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악마의 시선은 성채의 천장을 넘어, 아득히 먼 곳에 존재하는 드높은 천상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놈의 목적은 성역의 파괴 따위가 아니었다.
디아블로가 거대한 발톱을 들어 허공을 찢어발기자,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공간이 일그러지며 거대한 차원 문이 열렸다. 핏빛 번개가 소용돌이치는 차원 문의 너머로는 눈부시게 빛나는 천상의 다이아몬드 문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곱 악마의 힘을 얻은 디아블로는 영원한 숙적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직접 천상으로 진격하려는 참이었다.
네팔렘이 절망적인 분노를 담아 무기를 휘두르며 결계를 부수고 돌진했지만, 디아블로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영웅을 벽으로 쳐박아버렸다. 뼈가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네팔렘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대악마는 이미 차원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레아를 구출할 기회도, 기적적인 부활의 가능성도 모두 잿더미 속에 영원히 묻혀버린 뒤였다.
디아블로의 거대한 그림자가 차원 문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자, 밀실을 가득 채우던 공포의 기운도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차원 문이 닫히며 남긴 매캐한 연기만이 텅 빈 방 안을 맴돌았다. 바닥에는 레아가 지니고 다니던 작은 목걸이만이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세상을 구하려던 순수한 소녀의 흔적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아드리아 역시 주인의 뒤를 따르기 위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네팔렘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레아의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영웅의 심장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아즈모단을 물리치고 성채를 지켜냈다는 승리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철저하게 농락당했다는 참담한 패배감만이 영웅의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티리엘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네팔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눈동자에도 깊은 슬픔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다.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디아블로가 천상을 타락시키게 둔다면 성역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철벽의 성채에 켜졌던 희망의 불빛은 꺼졌지만 두 필멸자는 다시 무기를 쥐었다. 가장 어두운 절망 속에서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확인한 자료
Blizzard 공식 설정: Book of Tyrael과 레오릭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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