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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 연대기 19화 · 눈보라 속에서 이어진 피

이 글의 목차
  1. 혹한의 네베스크와 기이한 환대
  2. 핏빛 환영과 깨어난 폭력
  3. 은둔자와 키요바샤드의 그림자
  4. 빛의 대성당과 맹목적인 신앙
  5. 흑호수와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서
  6. 라트마의 최후와 천사의 오만
  7. 핏빛 타락과 네이렐의 슬픔
  8. 추적의 시작과 다가오는 그림자
  9. 확인한 자료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혹한의 네베스크와 기이한 환대

네베스크의 따뜻한 화로 옆에 앉아 바니의 스튜를 먹고 중독되는 방랑자.
네베스크의 따뜻한 화로 옆에 앉아 바니의 스튜를 먹고 중독되는 방랑자.

조각난 봉우리의 살을 에이는 눈보라가 방랑자의 낡은 망토를 찢어발길 듯 몰아쳤다. 백색의 절망 속에서 방랑자는 얼어붙은 발걸음을 억지로 내디뎠다. 체력이 바닥나고 의식이 흐려질 무렵, 거센 눈보라 너머로 희미하게 흔들리는 횃불이 기적처럼 시야에 나타났다.

그 불빛은 네베스크라는 고립된 마을에서 새어 나오는 유일한 구원의 신호였다. 방랑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어 선술집의 낡은 나무 문을 거칠게 두드리고는 쓰러졌다. 문이 열리며 쏟아져 나온 따뜻한 공기와 낯선 이들의 웅성거림이 얼어붙은 뺨을 어루만졌다.

마을의 지도자 바니는 다급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지시하며 방랑자를 화로 곁으로 부축했다. 타오르는 장작불의 온기가 방랑자의 굳어 있던 혈관을 천천히 녹여주었다. 바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튜 한 그릇을 차가운 손에 쥐여주었다.

낯선 이방인에게 베푸는 과분한 환대는 척박한 산악 지대에서는 보기 드문 정경이었다. 방랑자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스튜를 크게 한 입 떠먹으며 경계심을 허물어뜨렸다. 그러나 뱃속을 채우던 스튜의 온기는 이내 기분 나쁜 서늘함으로 변하여 온몸으로 퍼졌다.

방랑자는 숟가락을 쥔 손가락 끝에서부터 마비가 시작되는 것을 느끼며 당혹감에 휩싸였다. 시야가 기이하게 일그러지며 화로의 불꽃이 악마의 춤사위처럼 붉은빛으로 번뜩였다. 방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차가운 나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방랑자의 흐릿한 시야 속으로, 인자했던 바니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광기와 이질적인 열망이 섬뜩하게 번득였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마을 사람들도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방랑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농기구 대신 날이 선 흉기들이 들려 있었고, 공기 중에는 짙은 피비린내가 배어 나왔다. 어머니께서 구원을 약속하셨다는 바니의 낯선 속삭임이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방랑자는 혀끝까지 마비되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끔찍한 진실을 깨달았다.

스튜에 섞인 것은 단순한 독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갉아먹고 어둠을 증폭시키는 주술의 매개체였다. 마을 사람들의 거친 손길이 방랑자의 사지를 결박하며 어두운 헛간을 향해 질질 끌고 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순간, 방랑자의 내면 깊은 곳에서 생존 본능이 꿈틀거렸다.

핏빛 환영과 깨어난 폭력

어두운 헛간에서 밧줄을 끊고 미쳐버린 마을 사람들에 맞서 싸우는 방랑자.
어두운 헛간에서 밧줄을 끊고 미쳐버린 마을 사람들에 맞서 싸우는 방랑자.

퀴퀴한 곰팡내와 썩은 피 냄새가 진동하는 헛간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방랑자는 의식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갑자기 핏빛 꽃잎들이 환영처럼 흩날리며 시야를 가득 채우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스튜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온 릴리트의 피가 영혼과 강제로 공명하는 순간이었다.

환영 속에서 창백한 피부와 거대한 뿔을 가진 악마 릴리트가 사람들에게 피를 먹이는 끔찍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피는 억눌려 있던 탐욕과 폭력성을 자극하여 그들을 잔혹한 광신도로 타락시켰다. 방랑자는 연결망을 통해 그들의 광기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환영이 걷히고 현실로 돌아온 순간, 마비되었던 근육에 기형적인 힘이 솟구치며 결박된 밧줄을 끊어낼 듯이 몸부림쳤다. 바니의 단검이 가슴을 찌르기 직전, 방랑자는 간신히 몸을 비틀어 치명상을 피하며 반격을 시작했다. 숨겨두었던 무기를 빼든 방랑자의 눈빛은 살기로 번뜩였다.

미쳐버린 마을 사람들은 고통조차 잊은 채 짐승 같은 괴성을 지르며 방랑자를 향해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방랑자는 날아오는 둔기를 간신히 피하며, 가장 먼저 달려든 사내의 무릎을 걷어차 중심을 무너뜨렸다. 피비린내 나는 헛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자비한 혈투가 벌어졌다.

어머니의 피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며 바니는 광기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다시 한번 단검을 휘둘렀다. 방랑자는 공격을 쳐내고 역공을 가하며, 자신에게 따뜻한 스튜를 건넸던 이들을 베어내야 하는 현실에 이를 악물었다. 무기가 부딪치는 파열음이 헛간을 가득 채웠다.

릴리트의 피에 취한 자들은 치명상을 입고도 쓰러지지 않으려 발악했지만, 방랑자의 숙련된 전투 기술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남은 광신도의 숨통을 끊어내자, 헛간 안에는 무거운 정적과 함께 짙은 피비린내만이 남았다. 방랑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방랑자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학살의 현장이 되어버린 헛간을 빠져나왔다. 차가운 눈보라가 다시 뺨을 때렸지만, 몸속에 흐르는 릴리트의 피가 남긴 기분 나쁜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방랑자는 자신이 이 거대한 음모에 씻을 수 없이 얽혀버렸음을 직감했다.

눈 쌓인 공터 한가운데 선 방랑자는 핏빛 환영이 남긴 잔상을 떨쳐내려 애쓰며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네베스크의 환대는 지옥의 어머니가 파놓은 잔혹한 함정이었고, 방랑자는 그 덫을 부수고 나온 생존자가 되었다. 이제 핏속에는 릴리트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새겨졌다.

은둔자와 키요바샤드의 그림자

AI 재구성 삽화 — 눈보라 속 로라스의 오두막에 도착한 방랑자.
AI 재구성 삽화 — 눈보라 속 로라스의 오두막에 도착한 방랑자.

핏빛으로 물든 눈밭 위로 거친 숨을 내쉬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로브를 걸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노인은 학살의 현장을 둘러보며 무겁게 혀를 찼다. 그는 자신을 마지막 호라드림 중 하나인 로라스 나르라고 소개했다.

로라스는 바닥에 쓰러진 시신들의 상태를 살피더니, 이 끔찍한 광기가 릴리트의 짓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방랑자가 릴리트의 피를 마시고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거의 영광을 잃은 호라드림의 현실을 한탄하던 로라스는 동행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릴리트의 흔적을 쫓아 조각난 봉우리의 중심 도시인 키요바샤드를 향해 혹독한 눈보라를 뚫고 걸음을 옮겼다. 로라스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세상에 다시 도래한 거대한 악의 위협에 대해 묵묵히 설명했다. 방랑자는 핏속의 연결 고리가 이 늙은 학자에게 희망이 되었음을 느꼈다.

며칠간의 여정 끝에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 키요바샤드의 억압적인 위용이 눈앞에 나타났다. 입구에는 빛의 대성당 소속 경비병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서 출입하는 모든 이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로라스는 경비병들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혀를 찼다.

경비병은 방랑자에게 작은 나무 팻말을 건네며, 자신의 가장 큰 죄악을 적어 불길에 태우는 정화 의식을 강요했다. 방랑자는 팻말을 받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속 깊은 곳의 두려움과 분노를 떠올리며 글귀를 새겼다. 화로 속에 팻말을 던져 넣자 경비병은 마지못해 길을 비켜주었다.

키요바샤드 내부는 견고해 보였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와 숨길 수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이단 심문관들이 순찰을 돌았고, 굶주린 빈민들은 차가운 길바닥에서 벌벌 떨며 구걸하고 있었다. 로라스는 빛의 이름 아래 자행되는 가혹한 통제를 씁쓸하게 지적했다.

방랑자는 릴리트의 피가 불러온 광기와는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이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호라드림의 지혜가 잊혀진 자리를 차지한 빛의 대성당은 맹목적인 신앙을 무기로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로라스는 낡은 여관으로 안내하며 이곳에서 릴리트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창밖으로 거대한 대성당의 첨탑이 눈보라 속에서 차가운 위용을 뽐내며 키요바샤드의 밤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방랑자는 화로 곁에 앉아 굳은 손을 녹이며, 네베스크에서 겪었던 핏빛 환영이 다시금 맴도는 것을 느꼈다. 천상과 지옥 사이에서 방랑자는 거대한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빛의 대성당과 맹목적인 신앙

키요바샤드에서 설교하는 대성당 사제 프라바와 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로라스와 방랑자.
키요바샤드에서 설교하는 대성당 사제 프라바와 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로라스와 방랑자.

다음 날 아침, 방랑자는 키요바샤드의 중심에 자리 잡은 빛의 대성당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에는 수백 명의 신도들과 무장한 기사들이 운집하여 누군가의 연설에 열광적으로 환호하고 있었다. 고위 사제 프라바가 단상에 올라 다가오는 어둠에 맞서 성전을 벌여야 한다며 부추겼다.

그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방랑자의 눈에는 그 확신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광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천사 이나리우스가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 기대어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프라바는 이나리우스의 뜻을 받들어 이단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외쳤다.

로라스는 군중의 열광적인 함성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린 채, 이나리우스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성역의 창조자이자 얼굴 없는 빛의 존재인 이나리우스는 오직 천상으로 귀환하려는 자신의 이기적인 구원에만 집착할 뿐이었다. 그는 지옥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장기말로 교단을 이용하고 있었다.

방랑자는 대성당 내부로 들어가,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비치는 눈부신 빛의 세례를 온몸으로 맞았다. 하지만 그 빛은 사람들의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지도 못하는 차갑고 공허한 환상에 불과했다. 제단 앞에서는 무장한 기사들이 이나리우스의 이름으로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맹세를 외치고 있었다.

그 순간, 방랑자의 핏속에 깃든 릴리트의 기운이 대성당의 성스러운 빛과 강렬하게 충돌하며 미세한 두통을 유발했다. 빛과 어둠, 천상과 지옥의 기운이 한 인간의 몸속에서 뒤엉키며 방랑자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방랑자는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고, 로라스는 재빨리 눈을 피해 구석으로 이끌었다.

이곳의 빛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고 그저 눈을 멀게 할 뿐이라며 로라스가 낮고 씁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방랑자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 거대한 종교적 광기가 릴리트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맹목적인 신앙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려 진짜 적을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성당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릴리트가 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옐레스나 지역의 광산에 대한 소문을 수집했다. 그곳에서 학자 베나드가 릴리트의 유혹에 넘어가 고대의 지식을 파헤치고 있다는 불길한 정보가 귀에 들어왔다. 로라스는 서둘러 광산으로 향하여 베나드를 막고 흔적을 쫓아야 한다고 재촉했다.

방랑자는 무기를 단단히 고쳐 쥐고 키요바샤드의 성문을 나서며, 뒤에서 들려오는 광신도들의 찬송가를 등졌다. 차가운 눈보라는 여전히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지만, 방랑자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훨씬 단호해져 있었다. 천사와 악마의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방랑자는 오직 자신의 의지로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흑호수와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서

어두운 광산 속에서 핏빛 꽃잎을 따라 들어가는 네이렐, 기사 비고, 그리고 방랑자.
어두운 광산 속에서 핏빛 꽃잎을 따라 들어가는 네이렐, 기사 비고, 그리고 방랑자.

광산 입구에 도착한 방랑자는 그곳에서 어머니 베나드를 애타게 찾고 있는 젊은 소녀 네이렐과 마주쳤다. 네이렐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절망이 가득했지만, 어머니를 구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알 수 없는 목소리에 홀려 흑호수로 내려갔다며 도움을 간청했다.

방랑자가 네이렐의 부탁을 수락하자, 대성당 소속 기사 비고가 무거운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다가왔다. 비고는 광산의 이단적인 움직임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지하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산한 기운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그는 방랑자의 실력을 확인하고는 마지못해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세 사람은 횃불 하나에 의지한 채 습하고 어두운 광산 깊은 곳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벽면에는 광부들이 파놓은 흔적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핏자국과 악마적인 문양들이 불길하게 새겨져 있었다. 네이렐은 핏자국을 볼 때마다 어머니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을까 봐 떨었다.

비고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환청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이나리우스의 기도를 중얼거려 불안감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러나 대성당의 빛은 이 깊고 습한 지하까지 닿지 않았고, 그의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었다. 방랑자는 앞장서서 걸으며 핏속에서 공명하는 기운을 나침반 삼아 통로를 헤쳐 나갔다.

바닥에 흩뿌려진 핏빛 꽃잎들이 마치 그들을 유인하듯 흑호수로 향하는 길을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방랑자는 꽃잎을 밟을 때마다 네베스크에서 겪었던 끔찍한 환영이 뇌리를 스치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오는 하급 악마들과 괴물들이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무기 앞에 쓰러졌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비고의 정신력은 한계에 달했고,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애원했다. 하지만 네이렐은 단호한 눈빛으로 비고의 말을 자르며, 어머니를 찾기 전까지는 절대 발길을 돌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방랑자는 긴장감을 묵묵히 지켜보며 무기를 털어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 저편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는 푸른빛과 함께, 기괴한 주문을 외우는 여성의 목소리가 동굴을 타고 울려 퍼졌다. 네이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고, 그녀는 방랑자를 뒤로한 채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나갔다. 방랑자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뒤를 쫓았고 마침내 흑호수의 기슭에 도달했다.

흑호수의 수면은 썩은 피처럼 검고 고요했으며, 중앙에는 거대한 유적의 잔해가 기괴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호숫가에는 네이렐의 어머니 베나드가 핏기 없는 얼굴로 허공을 향해 끊임없이 주문을 속삭이고 있었다. 방랑자는 베나드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짙은 마기를 감지하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무기를 쥐었다.

라트마의 최후와 천사의 오만

라트마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며 지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릴리트의 환영.
라트마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며 지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릴리트의 환영.

베나드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방랑자의 시야가 붉게 물들며 핏속의 릴리트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현실의 흑호수가 사라지고, 방랑자의 눈앞에 고대의 신전과도 같은 스산한 환영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그곳에는 얼굴 없는 빛의 존재이자 등 뒤로 빛의 날개를 펼친 천사 이나리우스와, 최초의 강령술사인 라트마가 대치하고 있었다. 이는 현재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현장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이 피의 연결을 통해 회상되는 순간이었다.

이나리우스는 오만한 목소리로 자신의 아들인 라트마에게 지옥으로 가는 열쇠를 내놓으라며 거칠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는 지옥을 정벌하여 천상의 용서를 받고 귀환하려는 이기적인 목적에 눈이 멀어 있었다. 라트마는 아버지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예언은 결코 천사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이나리우스는 빛의 창을 치켜들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핏줄인 라트마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꿰뚫었다. 방랑자는 피의 꽃잎이 전하는 과거의 메아리 속에서 라트마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광경을 지켜보며 천사의 잔혹함에 숨이 막혔다. 이는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는 실시간 전투가 아니라, 이미 종결된 과거의 비극을 영혼의 연결로 목격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나리우스는 죽어가는 아들을 차갑게 내려다보고는 신경질적으로 돌아서서 사라졌다.

환영 속의 장소에 릴리트가 나타나 바닥에 싸늘하게 식어 있는 라트마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창백한 뺨을 어루만지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오열을 토해냈다. 릴리트의 슬픔은 이내 이나리우스를 향한 걷잡을 수 없는 증오와 세상을 불태워버리겠다는 분노로 변해갔다.

릴리트는 라트마가 숨겨둔 지옥의 열쇠를 찾아내어 손에 쥐고는, 피의 복수를 다짐하며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환영이 끝나는 순간 방랑자는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실의 흑호수로 돌아왔다. 핏속에 각인된 이 끔찍한 가족의 비극은 성역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을 재앙의 시작이었다.

방랑자는 창조자들의 끔찍한 존속 살해를 목격하고, 이나리우스가 결코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확신했다. 천상의 빛은 오만하고 잔혹했으며, 지옥의 어둠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들끓어 피바다를 만들 준비를 마쳤다. 방랑자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이 환영을 보여준 릴리트의 피가 지닌 힘에 다시 한번 전율했다.

네이렐은 방랑자가 허공을 응시하며 비틀거리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와 괜찮은지 물으며 팔을 붙잡았다. 방랑자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정신을 다잡고, 호숫가에서 여전히 광기에 찬 주문을 외우고 있는 베나드를 노려보았다. 환영 속 릴리트의 분노가 남긴 잔상이 심장을 짓눌렀지만 지금은 눈앞의 비극을 막아야 했다.

어머니께서 길을 열어주셨다며 베나드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고,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검게 물들어 있었다. 릴리트의 유혹에 완전히 잠식당한 베나드는 딸의 부름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피를 바쳐 지옥의 문을 열려 했다. 방랑자는 무기를 고쳐 쥐고, 네이렐을 보호하기 위해 악마들의 무리 앞으로 뛰어들었다.

핏빛 타락과 네이렐의 슬픔

흑호수가에서 사망한 어머니 베나드를 안고 깊은 슬픔에 잠겨 오열하는 네이렐.
흑호수가에서 사망한 어머니 베나드를 안고 깊은 슬픔에 잠겨 오열하는 네이렐.

베나드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기가 흑호수를 때리자,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끔찍한 형상의 악마들이 솟아올랐다. 네이렐은 눈앞에서 괴물로 변해가는 어머니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고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지만, 방랑자는 침착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악마들의 목을 베어 넘겼다.

이 지식만이 널 강하게 만들 거란다며 베나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광기에 찬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녀는 릴리트가 약속한 힘이 딸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자신의 생명력마저 태우고 있었다. 방랑자는 포위망을 뚫고 다가가려 했지만,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 탓에 발이 묶였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방랑자의 칼날이 거대한 악마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 베나드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마력의 장막이 산산조각 났다. 반동으로 베나드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차가운 바닥으로 맥없이 추락하며 각혈을 쏟아냈다. 악마들은 잿빛 연기로 변해 흩어졌고, 흑호수 주변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네이렐은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쓰러진 어머니에게 다가가, 피투성이가 된 베나드의 몸을 끌어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베나드의 눈동자에서 검은 마기가 걷히며, 잠시나마 원래의 따뜻하고 이성적인 어머니의 빛이 돌아오는 듯했다. 그녀는 피 묻은 손을 들어 올려 네이렐의 뺨을 어루만지려 했지만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안하다 내가 틀렸다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베나드는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네이렐은 어머니의 시신을 부여잡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고, 그 소리는 동굴 벽을 타고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방랑자는 릴리트가 지나간 자리에는 죽음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고는 뒤늦게 다가와 베나드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이나리우스의 자비조차 이 비극을 막지 못했다며 자책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대성당의 맹목적인 신앙이 현실의 고통 앞에서는 얼마나 무기력한지 깨닫고 환멸감을 느끼는 듯했다. 방랑자는 무기를 거두고 네이렐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어 작은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네이렐은 방랑자의 손길을 밀어내며,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결연한 눈빛으로 흑호수 너머를 응시했다.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소녀의 마음속에는 릴리트를 향한 차가운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고대의 지식이 담긴 책을 품에 안고 비극의 원흉을 끝까지 쫓겠다고 다짐했다.

방랑자는 네이렐의 굳은 의지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베나드의 시신을 차가운 동굴 바닥에 눕혀주었다. 환영 속에서 릴리트가 라트마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던 모습과, 네이렐이 어머니를 잃고 슬퍼하는 모습이 기묘하게 겹쳐 보였다. 방랑자는 릴리트의 저주가 자신과 네이렐의 운명을 잔혹하게 옭아매고 있음을 체감했다.

추적의 시작과 다가오는 그림자

릴리트를 추적하기 위해 울부짖는 눈보라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로라스, 네이렐, 그리고 방랑자.
릴리트를 추적하기 위해 울부짖는 눈보라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로라스, 네이렐, 그리고 방랑자.

흑호수의 참극이 끝난 후, 뒤늦게 소식을 듣고 광산 깊은 곳까지 내려온 로라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일행과 합류했다. 그는 베나드의 시신과 슬픔에 잠긴 네이렐을 번갈아 보며, 타락을 제때 막지 못한 것에 탄식을 내뱉었다. 로라스는 네이렐에게 다가가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하며 어머니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방랑자는 로라스에게 흑호수에서 겪었던 라트마와 이나리우스, 그리고 릴리트에 대한 핏빛 환영의 내용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로라스의 얼굴은 예언과 지옥의 열쇠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사색이 되었고, 사태가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나리우스의 오만과 릴리트의 분노가 맞부딪친다면 성역은 끔찍한 지옥으로 변할 것이 뻔했다.

비고는 더 이상 이 미친 싸움에 얽히고 싶지 않다며,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더니 도망치듯 동굴을 빠져나가 버렸다. 로라스는 도망치는 비고를 탓하지 않고, 이 거대한 절망 앞에서는 도망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능이라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방랑자와 네이렐은 결코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운명이었다.

지옥의 최후는 아직 오지 않았고 오히려 진짜 재앙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며 로라스가 흑호수를 응시했다. 릴리트는 지옥의 열쇠를 쥐었고, 그녀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번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호라드림은 쇠퇴했고 대성당은 광기에 빠져 있었기에 이들을 막을 자는 방랑자뿐이었다.

네이렐은 눈물을 닦아내고 어머니의 유품인 마법서를 가방에 단단히 챙겨 넣으며, 로라스와 방랑자 곁에 서서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비록 어리고 연약한 소녀였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그 어떤 전사보다도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방랑자는 피투성이가 된 무기를 다시 한번 꽉 쥐며 핏속에서 맥동하는 릴리트의 기운을 억눌렀다.

세 사람은 흑호수의 스산한 기운을 뒤로한 채, 릴리트가 남긴 핏빛 흔적을 쫓아 다시 어둡고 습한 광산 통로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상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지만, 발걸음에는 망설임 대신 확고한 목적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방랑자는 앞장서서 길을 개척하며 두 거대한 존재 사이에서 성역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광산 입구를 빠져나오자, 조각난 봉우리의 눈보라가 다시금 뺨을 매섭게 때렸지만 일행은 묵묵히 폭풍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릴리트의 피를 마신 방랑자, 늙은 호라드림, 그리고 복수를 다짐한 소녀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향해야 할 다음 목적지는 릴리트의 타락이 뻗어나간 또 다른 어둠의 심연을 향해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핏빛 꽃잎의 환영이 다시 한번 아른거렸지만, 방랑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눈을 번뜩였다. 지옥의 어머니가 성역에 뿌려놓은 피의 씨앗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고 있었지만, 방랑자의 칼날은 그 뿌리를 잘라낼 준비를 마쳤다. 눈보라 속에서 이어진 피의 추적은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확인한 자료

Blizzard 공식 설정: 아카라트와 영혼 세계

Blizzard 공식 자료: 증오의 그릇에서 증오의 군주로

Blizzard 공식 자료: 증오의 군주 캠페인

Polygon 사건 해설: 증오의 군주 결말

디아블로4 공식 구매처: Battl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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