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연대기 18화 · 지혜가 죽음의 이름을 택할 때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검은 영혼석의 봉인

티리엘은 횃불이 일렁이는 라키스의 무덤 지하 깊은 곳의 어두운 통로를 묵묵히 걸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호라드림 로라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검은 영혼석을 호위하며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영혼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기운은 필멸자의 연약한 정신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듯했다.
대악마의 정수가 갇힌 이 돌은 천상의 수정 회랑마저 타락시켰던 끔찍한 물건이었다. 티리엘은 천상과 지옥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고대 라키스의 무덤만이 이 돌을 숨길 유일한 장소라고 판단했다. 호라드림 학자들은 무거운 궤를 내려놓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땀을 닦았다.
로라스는 영혼석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악마의 속삭임에 몸을 떨며 티리엘의 눈치를 살폈다. 필멸자가 된 티리엘 역시 그 사악한 파동을 느끼고 있었지만 지혜의 화신이었던 그는 애써 두려움을 억눌렀다. 마침내 무덤의 가장 깊은 안치소에 도달하자 일행은 안도감에 탄성을 내뱉었다.
티리엘은 복잡한 봉인 의식을 시작하며 호라드림에게 결계의 룬을 바닥에 새기라고 지시했다. 푸른빛의 마법진이 영혼석을 감싸며 억압적인 공기를 조금씩 정화하기 시작했다. 로라스는 마법진의 빛을 보며 이 저주받은 유물이 마침내 세상과 영원히 격리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티리엘은 영혼석을 바라보며 과거 천상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전투의 기억을 떠올렸다. 디아블로가 천상을 짓밟았을 때 흘렸던 천사들의 피와 네팔렘의 고군분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돌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결계가 완성되어 갈수록 무덤 내부의 공기는 점차 차분해졌고 악마의 속삭임도 잦아들었다. 호라드림 학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무기를 내려놓고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티리엘 역시 팽팽했던 긴장을 풀고 로라스를 향해 수고했다는 격려의 말을 건네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모든 작업이 순조롭게 끝나는 듯했던 그 순간 무덤 내부의 공기가 갑작스럽게 얼어붙었다. 벽면에 꽂혀 있던 횃불들이 일제히 푸른빛으로 타오르다 이내 차갑게 식어버리며 짙은 어둠이 깔렸다. 봉인의 마법진마저 기괴한 균열음을 내며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고 냉기가 피어올랐다.
짙은 어둠 속에서 호라드림 학자들의 숨통을 조여오는 거대한 압박감이 무덤 전체를 짓눌렀다. 로라스는 본능적으로 무기를 쥐었지만 보이지 않는 공포에 짓눌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티리엘은 이 익숙하고도 소름 끼치는 기운의 정체를 깨닫고 절망에 찬 목소리로 검을 빼 들었다.
죽음의 강림

허공에서 서리가 뭉치며 거대한 낫을 든 잿빛 날개의 천사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지혜의 대천사였으나 이제는 죽음의 천사가 되어버린 말티엘이 그들 앞에 강림한 것이다. 말티엘의 창백한 형상은 생명의 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허무 그 자체였다.
티리엘은 옛 형제를 향해 검을 겨누며 도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말티엘은 아무런 대답 없이 유령처럼 미끄러져 다가와 학자들을 향해 낫을 휘둘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동료들의 몸에서 푸른 영혼이 빠져나와 말티엘에게 흡수되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학살에 로라스는 공포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말티엘은 필멸자의 생명을 거두는 행위에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냉혹한 사신이었다. 티리엘은 남은 호라드림을 지키기 위해 성검 엘드루인을 휘둘렀지만, 검은 말티엘의 반투명한 육신을 그대로 통과해 버릴 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말티엘은 악마의 피가 섞인 인류를 우주의 오점으로 여겨 완전히 멸절시키려는 끔찍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는 검은 영혼석의 힘을 이용해 성역의 모든 필멸자들의 영혼을 흡수하여 영원한 분쟁을 끝내려 했다. 티리엘은 그의 광기 어린 목적을 직감하고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티리엘은 로라스에게 당장 도망쳐 네팔렘을 찾아오라고 명령하며 자신의 몸을 던져 말티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로라스는 눈물을 머금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고 말티엘은 굳이 도망치는 필멸자를 쫓지 않았다. 티리엘은 네팔렘이 널 막을 것이라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말티엘은 티리엘의 경고에 잠시 멈춰 서서 차가운 시선으로 옛 형제의 타락한 필멸의 육신을 내려다보았다. '누구도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서늘한 목소리가 무덤의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것은 오만함이 아니라 우주의 절대적인 법칙을 선고하는 확신이었다.
말티엘은 티리엘의 가슴에 손을 얹고 영혼을 거두려 했으나, 그의 영혼이 악마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천사의 정수임을 깨닫고는 수확을 멈춘 채 그를 벽으로 강하게 밀쳐버렸다. 티리엘은 벽에 부딪혀 바닥에 쓰러졌고, 죽음의 천사는 더 이상 방해물이 없는 제단으로 다가가 붉은빛을 뿜어내는 검은 영혼석을 손에 쥐었다.
말티엘은 영혼석을 품에 안고 서리가 흩날리는 허공 속으로 흔적도 없이 스며들어 사라져버렸다. 어둠이 걷힌 무덤에는 영혼을 빼앗긴 채 차갑게 식어버린 호라드림의 시신들과 피를 흘리는 티리엘만이 남았다. 티리엘은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네팔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눈을 감았다.
서부원정지의 참상

로라스의 다급한 전갈을 받은 네팔렘은 서둘러 서부원정지로 향했지만 도시는 이미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뒤덮였고 거리 곳곳에는 생기를 잃고 쓰러진 시민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말티엘의 수확자 군단이 도시를 휩쓸며 살아있는 모든 자의 영혼을 뽑아내고 있었다.
네팔렘은 골목에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생존자들을 쫓는 기괴한 형태의 수확자들을 목격했다. 죽음의 안개를 뿜어내는 수확자의 낫이 아이를 안은 여인에게 내리쳐지려는 찰나 네팔렘이 무기를 휘둘러 막아섰다. 강력한 타격에 수확자의 뼈대가 부서지며 흉측한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겁에 질린 시민들을 안전한 지하 묘지로 대피시킨 네팔렘은 도시 중심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부상을 입고 숨을 고르던 티리엘과 재회한 네팔렘은 검은 영혼석을 빼앗겼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티리엘은 말티엘이 악마의 피가 섞인 인류를 완전히 멸절시키려 한다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영혼석의 힘을 이용해 필멸자들의 영혼을 흡수하면 말티엘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가 될 터였다. 네팔렘은 자신의 동족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참상을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서부원정지의 수비대마저 수확자들에게 당해 언데드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희망은 네팔렘뿐이었다.
거리를 전진할수록 수확자들의 저항은 거세졌고 영혼을 잃은 시체들이 기괴한 괴물로 부활해 앞을 가로막았다. 네팔렘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적들의 진형을 돌파하며 죽음의 마법을 무자비하게 찢어 발겼다. 무기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이 잠시나마 해방되어 빛으로 흩어졌다.
도시의 하수구와 빈민가를 수색하며 네팔렘은 숨어 있던 수십 명의 생존자들을 추가로 구출해냈다. 살아남은 자들은 네팔렘의 든든한 뒷모습을 보며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구원의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시의 학살을 완전히 멈추기 위해서는 수확자 군단을 지휘하는 우두머리를 처치해야만 했다.
자카룸 성당 쪽에서 거대한 화염이 솟아오르며 도시의 남은 구역마저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티리엘은 말티엘의 가장 충직한 부관인 우르자엘이 도시 전체를 불태워 생존자를 몰살하려 한다고 경고했다. 불길이 번지는 속도로 보아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네팔렘은 생존자들을 뒤로하고 성당을 향해 달렸다.
무너져 내리는 건물 잔해와 치솟는 불기둥을 피해 네팔렘은 성당의 넓은 안뜰로 거침없이 진입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대포를 든 우르자엘이 미친 듯이 웃으며 피난민들이 숨어 있는 건물을 향해 포구를 겨누고 있었다. 인간을 향한 맹목적인 증오로 가득 찬 우르자엘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화염 속의 우르자엘

우르자엘의 대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은 단순한 불이 아니라 영혼을 태우는 끔찍한 죽음의 마법이었다. 네팔렘은 바닥을 구르며 치명적인 불길을 간신히 피했지만 뺨을 스친 열기만으로도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꼈다. 성당의 종탑이 화마에 휩싸여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고 전장은 아비규환으로 변해갔다.
우르자엘은 육중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속도로 도약하여 네팔렘의 머리 위로 대포를 내리찍었다.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파편이 튀었고 네팔렘은 방패를 들어 그 무식한 충격파를 온몸으로 버텨냈다. 팔 뼈가 부러질 듯한 압박 속에서도 네팔렘은 결코 물러서지 않고 반격의 틈을 노렸다.
네팔렘은 우르자엘이 화염을 재장전하는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다리 관절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우르자엘의 갑옷 일부가 부서졌고 그는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비틀거렸다. 분노한 우르자엘은 성당의 타오르는 들보를 뜯어내어 네팔렘을 향해 무자비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불타는 나무 기둥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가려 네팔렘의 호흡을 방해했다. 하지만 네팔렘은 직감과 전투의 본능에 의지해 우르자엘의 맹공을 흘려보내며 치명타를 먹일 기회를 엿보았다. 우르자엘이 크게 기둥을 휘두르고 자세가 무너진 찰나 네팔렘은 망설임 없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네팔렘의 무기가 우르자엘의 가슴 흉갑을 정확히 꿰뚫었고 짙은 잿빛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치명상을 입은 우르자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비틀거렸지만 끝내 대포를 놓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발악으로 자신의 몸에 남은 모든 화염 마법을 폭발시켜 동귀어진을 시도했다.
눈부신 섬광과 함께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으나 네팔렘은 재빠르게 무너진 기둥 뒤로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다. 매연이 걷힌 후 안뜰 중앙에는 검게 탄 우르자엘의 잔해만이 덩그러니 남아 흉측한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서부원정지를 위협하던 거대한 불길이 서서히 잦아들며 생존자들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티리엘이 절뚝거리며 다가와 우르자엘의 최후를 확인하고는 네팔렘의 굳건한 용기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우르자엘을 물리쳤음에도 검은 영혼석을 쥔 말티엘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여 안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 티리엘은 말티엘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영혼석과 연결된 마녀 아드리아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드리아는 디아블로를 부활시키기 위해 영혼석을 조작했던 장본인이자 레아를 희생시킨 철천지원수였다. 그녀가 피의 습지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네팔렘은 과거의 빚을 청산하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서부원정지의 참상을 뒤로한 채 네팔렘은 끝없는 복수와 추적의 길에 다시 한번 올랐다.
피의 습지와 마녀 아드리아

피의 습지는 이름 그대로 썩은 피와 오물로 뒤덮인 악취 나는 늪지대이자 저주받은 땅이었다. 끈적이는 진흙 속에서는 고대 네팔렘들의 잊힌 유적들이 흉측한 뼈대처럼 솟아나와 기괴한 풍경을 연출했다. 네팔렘은 발목까지 빠지는 늪을 헤치며 아드리아가 숨어 있는 코르부스의 거대한 무기실을 향해 전진했다.
습지 곳곳에는 아드리아의 피의 마법으로 탄생한 끔찍한 혈사괴물들이 매복해 방문자를 노리고 있었다. 핏빛 촉수들이 진흙 속에서 튀어나와 네팔렘의 다리를 휘감았지만 단호한 칼날에 여지없이 잘려 나갔다. 네팔렘은 억울하게 희생된 레아를 떠올리며 마녀를 향한 차가운 분노를 칼끝에 집중하여 적들을 베어 넘겼다.
마침내 도달한 고대 유적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피의 웅덩이가 끓어오르며 역겨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 중앙에 선 아드리아는 이미 인간의 모습을 잃고 기괴한 날개와 촉수를 지닌 흉측한 악마로 변이해 있었다. 그녀는 네팔렘을 발견하고는 디아블로의 귀환이 머지않았다며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아드리아는 자신의 배신이 모두 주인을 위한 위대한 헌신이었다며 레아의 희생조차 영광스러운 일이라 조롱했다. 그 망언에 네팔렘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고 맹렬한 기세로 땅을 박차고 올라 아드리아를 향해 돌진했다. 아드리아는 피의 웅덩이에서 붉은 마력의 구체를 쏘아내며 네팔렘의 접근을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핏방울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흉측한 핏덩이 괴물들이 솟아나와 네팔렘의 사방을 포위해 들어왔다. 네팔렘은 광역 기술을 펼쳐 괴물들을 단숨에 쓸어버리고 아드리아의 방어막을 거칠게 타격하며 몰아붙였다. 아드리아는 텔레포트로 위치를 바꾸며 교활하게 마법을 퍼부었지만 네팔렘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치열한 공방 끝에 네팔렘의 치명적인 일격이 아드리아의 흉측한 날개를 찢고 등허리를 깊게 베었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뒹군 아드리아는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네팔렘은 자비를 구하는 마녀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마지막 숨통을 끊을 준비를 마쳤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아드리아는 디아블로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저주 섞인 예언을 내뱉으며 광기를 드러냈다. 네팔렘이 무기를 내리치기 직전 그녀는 말티엘이 영혼석을 들고 혼돈의 요새로 향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누설했다. 마침내 무기가 아드리아의 심장을 꿰뚫었고 마녀는 한 줌의 재로 변해 웅덩이 속으로 사라졌다.
레아의 원수를 갚았다는 씁쓸한 위안도 잠시 네팔렘은 말티엘이 혼돈의 요새에 있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그곳은 천상과 지옥이 영원한 분쟁을 벌이는 우주의 흉터이자 모든 창조와 파괴의 중심지였다. 티리엘과 합류한 네팔렘은 인류의 존망이 걸린 최후의 결전을 위해 판데모니움으로 통하는 차원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혼돈의 요새로 향하는 길

차원문을 넘어 도착한 판데모니움은 천상의 수정과 지옥의 용암이 기괴하게 얽혀 있는 혼돈의 공간이었다. 허공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중력을 거스른 채 떠다녔고 귓가에는 수천 년간 이어진 천사와 악마들의 비명이 환청처럼 맴돌았다. 티리엘은 이 고대의 전장을 바라보며 네팔렘이라는 존재가 탄생하게 된 기원을 묵묵히 회상했다.
말티엘의 수확자 군단은 혼돈의 요새로 향하는 길목마다 진을 치고 네팔렘의 접근을 결사적으로 막아섰다. 강력한 죽음의 기사들과 영혼 마법사들이 쏟아내는 공격은 서부원정지에서의 전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하지만 네팔렘은 천사와 악마의 힘을 모두 다루는 자신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며 적들을 압도했다.
요새의 깊은 곳으로 나아갈수록 네팔렘은 과거에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인간 영혼들의 메아리와 마주했다.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의 슬픔과 분노가 요새의 벽을 타고 흘러내리며 네팔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티리엘은 인간의 영혼이 지닌 나약함 속에 숨겨진 무한한 가능성과 강인한 의지를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말티엘은 인간을 단지 악마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완전하고 타락한 존재라 규정하며 멸절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네팔렘이 보여주는 희생과 용기는 말티엘의 차가운 논리가 얼마나 오만하고 편협한 것인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티리엘은 지혜를 버리고 죽음을 택한 옛 형제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며 네팔렘의 뒤를 받쳐주었다.
요새의 심장부를 지키는 거대한 성문 앞에는 말티엘이 심어둔 가장 강력한 영혼 수호자들이 버티고 있었다. 네팔렘은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하여 수호자들의 방진을 무너뜨리고 맹렬한 연속 공격을 퍼부어 적들을 분쇄했다. 굉음과 함께 수호자들의 뼈대가 부서져 내리며 굳게 닫혀 있던 혼돈의 요새 중심부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는 빛도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허무의 공간이 입을 벌린 채 그들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티리엘은 이 문을 넘어서면 필멸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진정한 죽음의 영역이 펼쳐질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그러나 네팔렘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무기를 고쳐 쥐고 차가운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시야를 가리는 짙은 안개 속에서 두 개의 낫이 뿜어내는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거대한 검은 영혼석이 허공에 떠서 불길한 붉은빛을 명멸하는 가운데 말티엘이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그는 네팔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영원한 분쟁을 끝낼 유일한 방법은 인류의 완전한 소멸뿐이라고 차갑게 선고했다.
네팔렘은 말티엘의 억지스러운 궤변을 일축하며 인류의 생존권은 그 누구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맞섰다. 말티엘은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양손의 낫을 교차시키며 죽음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우주의 운명을 결정지을 죽음의 천사와 필멸의 영웅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최후의 결전이 마침내 막을 올렸다.
죽음과의 결전

말티엘은 유령처럼 전장을 미끄러지며 예측할 수 없는 궤적으로 거대한 낫을 휘둘러 네팔렘을 거세게 압박했다. 낫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죽음의 안개가 뿜어져 나와 네팔렘의 숨통을 집요하게 조여왔다. 네팔렘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회피하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지만 말티엘의 방어는 빈틈없이 완벽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말티엘은 전장 곳곳에 영혼의 소용돌이를 소환하여 네팔렘의 생명력을 서서히 흡수하기 시작했다. 체력이 바닥나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네팔렘은 불굴의 의지로 버티며 맹공을 퍼부었다. 네팔렘의 무기가 마침내 말티엘의 창백한 방어막을 뚫고 그의 흉갑에 깊은 균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은 말티엘은 뒤로 물러서며 필멸자의 힘이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이대로라면 자신이 패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결코 해서는 안 될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 말티엘은 전장 중앙에 떠 있던 검은 영혼석을 향해 손을 뻗어 자신의 강력한 마력을 한곳으로 집중시켰다.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검은 영혼석이 산산조각 나며 갇혀 있던 일곱 대악마의 검은 정수가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말티엘은 그 사악한 정수들을 자신의 몸속으로 남김없이 흡수하며 죽음과 악이 융합된 끔찍한 존재로 돌변했다. 그의 잿빛 날개는 핏빛으로 물들었고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디아블로의 공포마저 품고 있어 숨을 막히게 했다.
악마의 힘까지 손에 넣은 말티엘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네팔렘을 무자비하게 몰아붙였다. 붉은 번개와 죽음의 안개가 전장을 뒤덮었고 네팔렘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격에 방어조차 버거워 비틀거렸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네팔렘은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고대 선조들의 진정한 힘에 정신을 온전히 집중했다.
천상의 빛과 지옥의 어둠을 모두 품은 네팔렘의 진정한 잠재력이 폭발하며 눈부신 오라가 전장을 환하게 밝혔다. 네팔렘은 말티엘의 붉은 번개를 정면으로 뚫고 돌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한 치명적인 일격을 거침없이 날렸다. 네팔렘의 무기가 말티엘의 교차된 낫을 산산조각 내고 그의 가슴 깊숙이 박혀 들어가며 치명상을 입혔다.
말티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몸에 박힌 무기를 내려다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가 흡수했던 수많은 영혼들과 대악마의 정수들이 통제력을 잃고 그의 몸 밖으로 거칠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죽음의 천사 말티엘은 형체를 잃고 혼돈의 요새 바닥으로 처참하게 추락하며 최후를 맞이했다.
폭발의 여파가 가라앉고 짙은 안개가 걷히자 전장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네팔렘만이 홀로 우뚝 서 있었다. 말티엘의 잔해에서 풀려난 무수한 인간의 영혼들은 네팔렘의 주위를 맴돌며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빛을 향해 승천했다. 인류를 멸절시키려던 죽음의 위협이 마침내 네팔렘의 손에 의해 완전히 종식되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풀려난 악마들과 새로운 두려움

승리의 기쁨도 잠시 말티엘의 죽음과 함께 해방된 것은 억울한 인간의 영혼들만이 아니었다. 부서진 검은 영혼석에서 빠져나온 일곱 대악마의 정수들이 혼돈의 요새 허공을 맴돌다 흩어지기 시작했다. 대악마 디아블로 역시 다시 자유의 몸이 되어 성역 어딘가에 새로운 재앙의 씨앗을 뿌릴 터였다.
네팔렘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검은 안개를 묵묵히 바라보며 이 싸움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서부원정지와 성역 곳곳에서 고통받는 생존자들을 수습하고 재건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네팔렘은 피 묻은 무기를 거두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티리엘이 기다리고 있는 요새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티리엘은 상처투성이가 된 네팔렘을 맞이하며 그가 이루어낸 기적 같은 승리에 깊은 경의와 찬사를 표했다. 지혜의 천사였던 자신조차 막지 못한 죽음의 화신을 필멸자인 네팔렘이 꺾었다는 사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티리엘은 네팔렘이야말로 천상과 지옥의 오랜 균형을 깨뜨리고 성역을 지켜낼 유일한 희망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네팔렘이 승전보를 안고 서부원정지로 먼저 떠난 후 홀로 남은 티리엘의 가슴 속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그는 필멸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두려움에 몸을 떨며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악마들의 부활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방금 세상을 구한 위대한 영웅을 향한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다.
네팔렘은 천상의 대천사들을 압도하고 지옥의 대악마들을 굴복시켰으며 마침내 죽음마저 완벽하게 정복해 버렸다. 그들의 잠재력은 우주의 창조주조차 두려워할 만큼 무한했고 그 힘의 끝이 어디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티리엘은 인간의 영혼이 지닌 고결함을 굳게 믿으면서도 동시에 그들 내면에 숨겨진 타락의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저 위대한 네팔렘이 타락의 유혹에 굴복하여 성역을 등지게 된다면 과연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티리엘은 스스로에게 던진 그 끔찍한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찾지 못한 채 깊은 절망감과 무력감에 휩싸였다. 지혜가 죽음으로 변질되는 것을 목격한 그에게 절대적인 힘의 타락은 더 이상 불가능한 상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티리엘은 검은 영혼석의 파편이 흩어진 혼돈의 요새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며 다가올 미지의 미래를 깊이 걱정했다. 네팔렘이 구원한 이 세상은 겉으로는 평화를 되찾은 듯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더 큰 파멸의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대악마들은 다시 깨어날 것이고 네팔렘은 끝없는 투쟁 속에서 자신의 고결함을 끊임없이 시험받게 될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티리엘의 낡은 망토를 흔들었고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 언제까지나 빛의 길을 걷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죽음의 위협은 사라졌으나 티리엘의 필멸의 심장 속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새로운 두려움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확인한 자료
Blizzard 공식 설정: Book of Tyrael과 레오릭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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