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연대기 20화 · 아들에게 남은 돌, 아버지에게 남은 이름
이 글의 목차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과거의 망령이 잠든 화염파괴 장원

잿빛 구름이 스코스글렌의 하늘을 무겁게 짓누르던 날, 방랑자는 진흙탕을 밟으며 화염파괴 장원으로 향했다. 빗방울이 차가운 갑옷을 때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대지를 채우고 있었다. 릴리트의 흔적을 쫓아 도착한 이 척박한 땅에는 오랜 세월 잊혀진 비밀이 잠들어 있었다.
장원의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촛불에 기대어 오래된 호라드림 문헌을 살피는 늙은 사내가 보였다. 한때 위대한 영웅으로 불렸던 도난은 이제 피로와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평범한 영주처럼 보였다. 그의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은 그가 감당해온 과거의 짐을 짐작게 했다.
방랑자가 로라스의 이름과 릴리트의 귀환을 언급하자, 도난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호라드림의 의무를 저버린 지 오래라며, 과거의 영광과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로라스와의 불편한 재결합을 요구하는 운명의 부름이 그를 몹시 괴롭게 만들었다.
그때 서재 한구석에서 젊고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난의 아들 요린이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낡은 검을 바라보며 자신도 호라드림의 길을 걷고 싶다는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도난은 그런 아들을 엄격한 목소리로 꾸짖으며,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려 안간힘을 썼다.
도난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과거의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 그와 두 명의 드루이드 동료인 에어리다와 나파인이 어떻게 악마 아스타로트를 물리쳤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의 희생과 결단이 스코스글렌에 평화를 가져왔다는 전설의 이면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들은 아스타로트의 정수를 거대한 영혼석에 봉인하고,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깊은 곳에 숨겼다. 하지만 그 봉인은 세 사람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도난은 그날 이후로 검을 내려놓았다. 그는 영혼석의 안전을 확신하면서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방랑자가 릴리트가 그 봉인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자, 도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만약 창조주가 아스타로트를 해방시킨다면 스코스글렌은 다시 불바다가 될 것이 뻔했다. 과거의 망령이 다시 깨어나고 있다는 공포가 장원의 차가운 공기를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
도난은 요린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라 명령하며, 자신은 방랑자를 도와 옛 동료들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했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다시 호라드림의 짐을 짊어지기로 한 그의 뒷모습에는 결연함과 함께 깊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것이 비극의 서막인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고독의 봉우리에서 마주한 타락

방랑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고독의 봉우리를 기어올라 에어리다를 찾아 나섰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망자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메아리쳤다. 스코스글렌의 죽은 자들이 안식을 찾지 못한 채 이승을 떠돌며 산 자들의 온기를 갈구하고 있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산 정상의 제단 앞에는 백발의 드루이드 에어리다가 서 있었다. 그녀는 망자들의 비탄에 젖은 노래에 맞춰 구슬픈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도난이 기억하던 긍지 높은 영웅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죽음의 무게에 짓눌려 부서져 버린 한 늙은 여인만이 그곳에 존재했다.
방랑자가 다가가 릴리트의 행방을 묻자, 에어리다는 공허한 눈동자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스코스글렌의 끝없는 죽음과 고통의 굴레에 지쳐버렸다고 고백했다. 아무리 싸워도 끝없이 쏟아지는 악마와 망자들의 파도 앞에서 그녀의 굳건했던 신념은 서서히 마모되어 갔던 것이다.
그때 릴리트가 찾아와 그녀에게 달콤한 구원을 속삭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망자들을 무기로 삼아 스스로를 지키는 힘을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에어리다는 스코스글렌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악마의 손을 잡았고, 그 대가로 아스타로트의 봉인에 대한 단서를 넘겨주고 말았다.
방랑자는 그녀의 어리석은 선택을 비난하며 검을 뽑아 들었지만, 에어리다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원혼들을 소환했다. 썩어가는 뼈와 살점들이 흙을 뚫고 일어나 방랑자를 에워쌌다. 한때 세상을 구했던 영웅이 이제는 세상을 파멸시킬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비극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번개가 내리치는 제단 위에서 마법과 강철이 격렬하게 격돌했다. 에어리다는 분노나 악의가 아닌, 오직 자신의 선택을 증명하려는 처절한 슬픔으로 마법을 쏟아냈다. 방랑자는 몰아치는 원혼들의 공격을 뚫고 들어가 그녀의 방어막을 하나씩 부수며 숨통을 조여갔다.
마침내 방랑자의 치명적인 일격이 에어리다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녀는 피를 토하며 제단 위로 쓰러졌고, 폭풍우는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녀는 릴리트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 중얼거리며, 아스타로트의 해방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 저주 섞인 유언을 남겼다.
방랑자는 차갑게 식어가는 에어리다의 시신을 산 정상에 남겨둔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도난의 오랜 동료가 타락하여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앞으로 다가올 재앙의 크기를 짐작게 했다. 릴리트의 그림자는 이미 스코스글렌의 가장 깊은 뿌리까지 썩어 들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부패한 수렁과 나파인의 절규

에어리다의 죽음을 뒤로하고 방랑자는 짙은 안개가 낀 수렁으로 나파인을 찾아 향했다. 숲은 온통 병들어 있었고, 거대한 나무들은 검은 진액을 흘리며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생명의 기운이 넘치던 드루이드의 성소는 이제 썩은 내가 진동하는 죽음의 늪으로 변해버렸다.
수렁의 중심부인 거대한 참나무 아래에서 방랑자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나파인은 부패한 나무뿌리들에 온몸이 꿰뚫린 채 나무와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다. 그의 피부는 껍질처럼 굳어 있었고, 찢어진 상처에서는 붉은 피 대신 끈적이는 검은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방랑자의 발소리에 나파인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그는 릴리트가 숲에 나타나 자연의 섭리를 뒤틀고 모든 생명을 타락시켰다고 말했다. 숲과 동화되어 있던 나파인은 그 거대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파인은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끔찍한 죄를 고백했다. 릴리트가 숲을 완전히 불태워버리겠다고 협박하자,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가 결국 아스타로트가 봉인된 장소를 털어놓고 만 것이다. 숲을 지키려던 그의 나약한 선택이 결국 숲과 세상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고 말았다.
부패한 뿌리들이 그의 장기를 파고들 때마다 나파인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는 방랑자에게 다가가 자신의 썩어가는 팔을 뻗으며 애원했다. 자신은 이미 늦었으니, 제발 릴리트를 막고 그녀가 아스타로트를 해방시키는 것을 막아달라는 처절한 부탁이었다.
나파인은 자신이 사랑했던 숲이 악마의 소굴로 변하는 것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며, 자신을 죽여 이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눈빛에는 드루이드로서의 긍지는 사라지고 오직 죽음만을 갈망하는 나약한 노인의 절망만이 가득했다.
방랑자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무기를 들어 올렸다. 나파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고, 방랑자의 일격이 그의 심장을 꿰뚫어 고통의 사슬을 끊어냈다. 거대한 참나무가 비명을 지르는 듯 숲 전체가 크게 흔들렸고, 나파인의 숨결은 영원히 멎어버렸다.
방랑자는 검에 묻은 검은 진액을 닦아내며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했다. 도난이 믿었던 두 명의 영웅이 모두 릴리트의 유혹과 협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아스타로트의 봉인으로 향하는 길을 막아설 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핏빛 제단과 소년의 희생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요린은 가문의 영지이자 아스타로트의 영혼석이 봉인된 엘드하임 성채를 지키기 위해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소년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를 도와 성역을 지키는 호라드림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숭고한 열망이 가득했지만, 그 성채가 곧 릴리트의 잔혹한 표적이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어두운 묘역의 중심에 도달한 요린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거룩한 빛이 아닌 핏빛 그림자였다. 릴리트가 이미 그곳에 도착해 아스타로트의 영혼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린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아버지의 낡은 검을 뽑아 들고 성역의 어머니를 향해 가냘픈 위협을 가했다.
릴리트는 소년의 가상한 용기를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요린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인정욕구를 파고들었다. 아버지를 뛰어넘는 위대한 힘을 주겠다는 그녀의 달콤한 속삭임은 소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공포를 기묘한 황홀경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단 위에서 붉게 맥동하는 거대한 영혼석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불길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수십 년 전 스코스글렌을 불태웠던 악마 군주 아스타로트의 끝없는 분노가 갇혀 있었다. 릴리트는 우아한 손짓으로 제단을 보호하던 호라드림의 결계를 산산조각 냈다.
릴리트의 목적은 단순히 아스타로트를 풀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악마 군주를 이승에 강림시키고 자신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필멸자의 육체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는 영웅의 핏줄을 이어받은, 더없이 완벽하고 순결한 제물이 스스로 걸어 들어와 있었다.
릴리트가 영혼석을 집어 들고 다가오자, 요린은 뒤늦게 도망치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힘에 짓눌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손이 소년의 이마를 향했고 붉은 빛이 시야를 가렸다. 요린의 절규에는 무엇이 일어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공포가 실려 있었다.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가 텅 빈 성채를 울렸으나, 대답해야 할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영혼석이 살을 파고들자 지옥의 불길이 소년의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요린의 하얀 피부가 검게 타들어 가고, 뼈마디가 기괴하게 꺾이며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소년의 순수한 자아는 억겁의 세월을 굶주린 악마의 거대한 의지 아래 무참히 짓밟히고 찢겨 나갔다.
마침내 요린의 비명이 짐승의 끔찍한 포효로 바뀌었다. 릴리트는 소년의 형체를 잃고 거대한 악마로 우뚝 선 아스타로트를 올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새롭게 태어난 악마 군주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스코스글렌의 심장, 세리가르를 잿더미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세리가르를 덮친 화염의 악마

하늘이 지옥의 불길을 머금은 듯 핏빛으로 물들자, 방랑자와 도난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세리가르로 말을 몰았다. 멀리서부터 매캐한 연기와 살타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평화로웠던 스코스글렌의 중심 도시는 이미 끔찍한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 있었다.
세리가르의 성벽은 무너져 내렸고, 거리 곳곳에는 뿔 달린 악마들이 쏟아져 들어와 무고한 주민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건물이 무너지는 굉음이 도시를 가득 채웠다. 방랑자는 앞을 가로막는 악마들을 베어 넘기며 도난과 함께 광장 중심부로 절망적인 돌파를 시도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기괴한 지옥의 야수 위에 올라탄 거대한 화염 악마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가 휘두르는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이 닿는 곳마다 재가 되어 흩어졌다. 수십 년 전 도난이 봉인했던 바로 그 악마, 아스타로트가 다시 강림한 것이다.
악마를 마주한 도난의 발걸음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그의 시선은 아스타로트의 이마에 박혀 붉게 빛나는 영혼석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 악마의 기괴한 얼굴 윤곽 속에서 끔찍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아들, 요린의 이목구비를 발견하고 말았다.
아스타로트는 도난을 발견하고는 요린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기괴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아버지를 부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이내 잔혹한 조롱으로 바뀌는 그 목소리는 도난의 이성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것은 악마가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완벽한 심리적 고문이었다.
도난은 무기를 떨어뜨린 채 불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나갔다. 하지만 아스타로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열기와 악마들의 장벽이 그를 거칠게 튕겨냈다. 도난은 바닥에 뒹굴면서도 피투성이가 된 손을 뻗어 아들의 이름을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아스타로트는 자비를 구하는 아버지의 절규를 비웃으며 세리가르의 생존자들을 향해 거대한 지옥불을 쏟아냈다. 경비병들의 방패가 녹아내리고 사람들은 산 채로 불타 재가 되어갔다. 이대로라면 도시는 물론 스코스글렌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방랑자는 절망에 빠져 오열하는 도난을 뒤로한 채, 굳은 결의를 다지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이 끔찍한 비극의 사슬을 끊어내야만 했다. 방랑자는 끓어오르는 열기를 뚫고 아스타로트의 거대한 짐승 앞을 막아서며 피할 수 없는 결전을 준비했다.
부서진 영혼석과 재가 된 소년

방랑자가 돌진하자 아스타로트는 거대한 지팡이를 휘두르며 광장을 화염의 바다로 만들었다. 지팡이가 땅을 강타할 때마다 폭발이 일어났고, 방랑자는 간발의 차이로 불길을 피하며 악마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열이 전신을 짓눌렀다.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야수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방랑자를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방랑자는 야수의 공격을 방패로 튕겨내고 그 다리에 깊은 상처를 냈다. 짐승이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내뱉자, 아스타로트는 더욱 분노하여 하늘에서 유성우를 소환해 내리꽂았다.
전투가 격렬해질수록 아스타로트는 요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도난과 방랑자를 도발했다. 호라드림의 긍지 따위가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악마의 조롱은 검날보다 더 날카롭게 도난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방랑자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방랑자는 악마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물리적인 타격만으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다. 악마의 육체를 유지하는 근원은 이마에 박힌 붉은 영혼석이었다. 방랑자는 쏟아지는 불길을 뚫고 야수의 등 위로 도약하여 아스타로트의 머리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모든 힘을 실은 방랑자의 일격이 아스타로트의 이마를 정확히 강타했다. 강철과 영혼석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영혼석에 균열이 가며 붉은빛이 명멸하자, 아스타로트의 거대한 육체가 통제력을 잃고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스타로트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이미 그의 형체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악마의 살점과 뼈가 검은 재로 변해 흩어지고, 지옥의 불길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지며 광장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악마의 거대한 형상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요린의 육체가 쓰러져 있었다. 소년의 이마에는 여전히 붉은빛을 잃고 탁해진 아스타로트의 영혼석이 깊숙이 박혀 있었고, 생명의 기운은 이미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다.
방랑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기를 내렸지만, 악마를 쓰러뜨렸다는 승리감 대신 눈앞에 남겨진 비극적인 광경에 가슴을 짓누르는 끔찍한 상실감을 느껴야 했다. 아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절망감이 광장의 무거운 공기 속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비의 통곡과 영혼석의 무게

도난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차갑게 식어버린 아들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두 손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난은 피눈물을 흘리며 요린의 이마에 박힌 저주받은 영혼석을 제 손으로 직접 뽑아내었다. 뼈가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영혼석이 떨어져 나오자, 그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듯 아들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가 도난의 피부를 데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가슴 깊이 끌어안았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영혼이 찢어지는 소리 같기도 한 처절한 통곡이 도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은 한 아버지가 가진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도난은 아들의 까맣게 탄 뺨에 얼굴을 비비며 끊임없이 용서를 구했다. 자신이 과거의 진실을 숨기지 않았더라면, 아들을 더 강하게 키웠더라면, 아니 애초에 호라드림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수만 가지의 후회와 자책이 독이 되어 그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방랑자는 그 참혹한 슬픔의 무게 앞에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만, 결국 한 소년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방랑자의 어깨를 짓눌렀다. 승리의 대가로 치러진 희생은 너무도 가혹하고 잔인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세리가르의 생존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피투성이가 된 주민들은 광장 중앙에서 오열하는 늙은 영웅의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누구도 감히 다가가 그의 슬픔을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도난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구는 영혼석에 머물렀다. 수십 년 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봉인했던 그 저주받은 돌이, 결국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운명의 잔혹한 장난 앞에 도난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영혼석을 움켜쥐었다.
하늘을 덮고 있던 먹구름에서 마침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비가 뜨거운 잿더미에 닿아 치명적인 연기를 피워 올렸고, 도난의 얼굴에 묻은 검은 재와 눈물을 씻어내렸다. 하지만 그 어떤 폭우도 그의 가슴에 새겨진 깊은 죄책감을 씻어낼 수는 없었다.
도난은 영혼석을 꽉 쥔 채 빗속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세상을 구했던 위대한 호라드림의 영광은 이제 영원히 사라졌고, 오직 아들을 잃은 아비의 텅 빈 껍데기만이 남았다. 세리가르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차갑게 스코스글렌을 덮고 있었다.
다시 짊어진 호라드림의 이름

몇 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세리가르를 집어삼켰던 불길은 빗물에 완전히 꺼지고 매캐한 냄새만이 남았다. 도난은 찢어진 망토를 벗어 요린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하룻밤 사이에 십 년은 족히 늙어버린 듯한 그의 얼굴에는 슬픔을 넘어선 기묘한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아들의 시신을 임시로 마련된 추모의 단상 위에 눕히고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방랑자는 묵묵히 그 곁을 지키며 도난이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다. 슬픔을 온전히 쏟아낸 도난의 눈동자 속에는 미약하지만 차갑고 단단한 불씨가 피어나고 있었다.
도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랑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그는 로라스가 옳았다고, 다가오는 거대한 어둠을 외면하려 했던 자신의 나약함이 이 모든 비극을 초래했다고 담담히 인정했다. 과거로부터 도망치려던 그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이제 로라스와의 껄끄러웠던 재결합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호라드림의 의무를 저버렸던 그가 다시 그 이름을 짊어져야만 하는 가혹한 필연이 되었다. 도난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낡은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나무의 감촉이 지친 그의 손안에서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방랑자에게 릴리트를 쫓아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거창한 대의나 호라드림의 긍지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성역의 어머니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모든 것을 잃은 아버지의 처절하고도 사적인 복수심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도난은 요린의 시신 앞에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고 짧은 기도를 올렸다. 아들에게 남겨진 것은 차가운 돌덩이와 끔찍한 고통뿐이었지만,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아들의 이름과 갚아야 할 피의 빚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켜 세리가르의 무너진 성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방랑자는 도난의 뒤를 따르며 다시 한번 무기를 단단히 고쳐 매었다. 스코스글렌에서의 상처는 깊고 뼈아팠지만, 릴리트의 발자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안은 채, 진흙투성이가 된 길을 따라 새로운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스코스글렌의 황야가 그들의 뒷모습을 삼켰다. 아스타로트의 위협은 끝났지만, 진정한 적은 아직 성역 어딘가에서 다음 제물을 찾고 있을 터였다. 도난의 작은 결심이 호라드림의 불꽃을 다시 피워올릴 수 있을지, 그 해답은 오직 앞으로 나아갈 길 위에만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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