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연대기 9화 · 사막의 무덤에서 놓인 손
이 글의 목차
원작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쓴 팬 서사입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 장면의 분위기는 재구성했으며 주요 결말을 포함합니다.
루트 골레인의 항구와 짙어지는 불안

와리브의 상단이 끝없는 모래바람을 뚫고 마침내 루트 골레인의 거대한 성벽 아래 당도했다. 사막의 보석이라 불리던 이 항구 도시는 예전의 활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영웅이 마차에서 내리자 짠내 섞인 바닷바람 대신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성문 앞을 지키던 용병대장 그레이즈는 창을 쥔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며칠 밤을 새운 듯 짙은 피로가 배어 있었고, 거친 목소리로 하수구에서 기어 나오는 괴물들 때문에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토로했다. 영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절망을 마주했다.
광장 한편에서는 늙은 학자 데커드 케인이 고대 문헌을 살피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다리엘을 꺾고 동진해 온 영웅을 반기면서도, 케인의 목소리에는 다가올 더 큰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묻어났다. 그는 어둠의 방랑자가 이 사막 어딘가로 향했다는 불길한 소식을 전했다.
마법사 드로그난은 팔짱을 낀 채 도시를 감싼 기운을 예민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는 방랑자가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 호라드림이 봉인한 파괴의 군주 바알을 찾고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 봉인처인 탈 라샤의 무덤을 찾아야만 이 끔찍한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드로그난의 설명에 따르면 탈 라샤는 자신의 몸을 바쳐 바알의 영혼석을 품고 영원한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무덤의 위치는 철저히 감춰져 있었고, 오직 호라드림의 지팡이만이 그 길을 열 수 있다고 했다. 영웅은 검 자루를 꽉 쥐며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게를 실감했다.
그레이즈는 무덤을 찾기 전에 당장 도시의 숨통을 조이는 하수구의 괴물부터 처치해 달라고 간청했다. 밤마다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 소리에 용병들조차 사기를 잃고 도망치는 실정이었다. 영웅은 망설임 없이 하수구로 향하는 쇠창살 문을 열어젖히며 깊고 습한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악취는 짙어졌고, 횃불의 불빛마저 스며드는 독기에 흐려졌다. 벽면에는 희생된 자들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이곳에서 벌어진 참상을 짐작게 했다. 영웅은 방패를 바짝 들어 올리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뼈 부딪치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축축한 통로의 끝에서 기괴한 주문을 외우는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고대 미라의 형상을 한 괴물, 라다먼트가 죽은 자들을 끊임없이 되살리며 영웅을 향해 독기를 뿜어냈다. 사막의 보석을 병들게 한 원흉과의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좁고 어두운 지하 공간에서 마침내 막을 올렸다.
하수구의 라다먼트와 호라드림의 단서

라다먼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맹독은 닿는 순간 숨을 턱 막히게 할 만큼 치명적이었다. 영웅은 재빠르게 몸을 굴려 독구름을 피한 뒤, 방패로 되살아난 해골들의 검격을 튕겨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미라의 붉은 안광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혐오하는 듯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되살아나는 시체들을 베어 넘겨도 라다먼트가 손을 휘저으면 이내 부서진 뼈들이 다시 엉겨 붙어 일어났다. 영웅은 무의미한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 괴물들의 틈새를 파고들어 곧장 우두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날카로운 검기가 썩은 붕대를 찢고 들어가자 라다먼트는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치명상을 입은 라다먼트가 발악하며 뿜어낸 마지막 독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영웅은 숨을 참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내리꽂았고, 거대한 미라는 마침내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그를 호위하던 언데드 무리 역시 주인을 잃고 일제히 재로 변해 흩어졌다.
라다먼트가 쓰러진 자리에는 오래된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핏자국과 오물로 얼룩져 있었지만, 표면에 그려진 고대 문양은 분명 호라드림의 것이었다. 영웅은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집어 들고 횃불 가까이에서 내용을 살피며 이것이 무덤을 찾을 단서임을 직감했다.
지상으로 돌아온 영웅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안도감에 젖은 그레이즈의 환한 미소였다. 용병대장은 굳게 닫혀 있던 도시의 하수구 입구를 봉쇄하며 영웅의 공로를 치하했다. 루트 골레인의 백성들은 비로소 밤의 공포에서 벗어나 짧은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고, 거리에 생기가 조금씩 돌았다.
데커드 케인은 영웅이 가져온 두루마리를 건네받고 떨리는 손으로 문자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름진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었고, 이내 두루마리가 호라드림 지팡이의 제작법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지팡이의 나무 자루와 금속 장식은 사막 곳곳에 나뉘어 숨겨져 있었다.
자루는 구더기 굴 깊은 곳에, 장식은 발톱 독사 사원에 봉인되어 있다는 케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두 조각을 찾아 호라드림의 함으로 융합해야만 탈 라샤의 무덤을 열 수 있는 온전한 지팡이가 완성된다. 영웅은 끝없이 펼쳐진 모래 언덕 너머를 바라보며 험난한 여정을 각오했다.
드로그난은 사막으로 나서는 영웅에게 마법의 보호가 담긴 물약을 건네며 경고했다. 방랑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이미 지옥의 악마들이 들끓고 있으며, 태양빛조차 그들의 사악한 마력을 뚫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영웅은 짐을 단단히 꾸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끝없는 사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막의 저주를 걷어내는 여정

메마른 언덕을 넘어 당도한 구더기 굴은 끔찍한 곤충 떼의 서식지로 변해 있었다. 거대한 모래 구더기들이 점액을 흩뿌리며 좁은 통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발을 디딜 때마다 불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웅은 횃불을 휘둘러 벌레들을 쫓아내며 지하 깊은 곳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굴의 최하층에는 산더미처럼 거대한 구더기 여왕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맹독을 품은 가시가 사방으로 쏘아지는 가운데, 영웅은 방패를 바짝 붙이고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여왕의 급소를 찔렀다. 끈적한 체액이 터져 나오며 쓰러진 여왕의 뒤편에서 영웅은 마침내 호라드림 지팡이의 나무 자루를 찾아냈다.
자루를 챙겨 밖으로 나오자, 사막의 하늘이 기이하게도 핏빛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은 빛을 잃었고, 서늘한 한기가 모래바람을 타고 스며들었다. 영웅은 이것이 발톱 독사들이 내린 저주임을 깨닫고, 어둠의 근원지인 잊힌 도시 너머의 독사 사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원의 내부는 차갑고 미끄러운 비늘을 가진 파충류 괴물들로 우글거렸다. 뱀의 머리를 한 인간형 괴물들은 날카로운 창을 휘두르며 영웅을 포위했고, 치명적인 독니를 번뜩이며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영웅은 검을 크게 휘둘러 포위망을 뚫고 제단이 있는 중심부를 향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끈질기게 이어갔다.
제단 위에는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태양의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주위를 맴도는 독사 우두머리를 처치한 영웅은 망설임 없이 제단을 검으로 내리쳐 산산조각 냈다. 쨍그랑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제단이 부서지자, 그 안에 봉인되어 있던 호라드림 지팡이의 금속 장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단이 파괴됨과 동시에 사막을 짓누르던 핏빛 어둠이 씻은 듯이 걷히기 시작했다. 구름 사이로 강렬한 태양빛이 다시 쏟아져 내리며 루트 골레인의 대지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영웅은 뱀 모양의 금속 장식을 품에 넣고, 마침내 지팡이의 두 조각을 모두 모았다는 성취감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도시로 돌아온 영웅은 호라드림의 함 안에 나무 자루와 금속 장식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케인이 알려준 고대의 주문을 외우자, 함 안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며 두 조각이 하나로 융합되었다. 마침내 탈 라샤의 무덤을 열 수 있는 온전한 호라드림 지팡이가 완성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지팡이를 얻었음에도 진짜 탈 라샤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여전히 미궁 속이었다. 드로그난은 궁전 지하에 열린 차원문을 통해 비전의 성역으로 가야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영웅은 완성된 지팡이를 등에 굳게 매고, 제르힌 왕이 열어준 궁전 지하의 깊은 어둠 속으로 향했다.
비전의 성역과 진짜 무덤의 환영

궁전 지하의 핏자국을 따라 내려간 끝에 영웅은 기하학적인 공간이 펼쳐진 비전의 성역에 발을 들였다. 허공에 떠 있는 돌길과 거꾸로 솟은 기둥들은 현실의 물리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우주의 심연을 걷는 듯한 기묘한 감각 속에서 영웅은 무덤의 단서를 찾아 미로를 헤매기 시작했다.
성역의 통로마다 화염을 뿜는 구울 군주들과 번개를 쏘아대는 유령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허공에서 날아오는 마법 공격을 방패로 튕겨내며 영웅은 아슬아슬한 돌길을 건너 적들을 베어 넘겼다. 한 치의 실수라도 하면 끝없는 심연으로 추락할 수 있는 아찔한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미로의 끝, 네 갈래 길이 교차하는 중심부에 미치광이 소환술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한때 트리스트럼에서 온 마법사 자즈레스였으나, 지금은 타락한 마력에 심취해 악마들을 부리는 괴물로 전락해 있었다. 자즈레스는 영웅을 향해 기괴한 웃음을 터뜨리며 파괴적인 화염구를 날려보냈다.
불길이 돌길을 휩쓰는 가운데 영웅은 기둥 뒤로 몸을 숨기며 화염구의 궤적을 파악했다. 자즈레스가 다음 주문을 외우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찰나의 순간, 영웅은 바닥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날카로운 검이 소환술사의 가슴을 꿰뚫자, 그의 웃음소리는 끔찍한 단말마로 변하며 허공에 흩어졌다.
자즈레스가 쓰러진 자리 뒤편에는 붉은빛을 뿜어내는 호라즌의 일지가 허공에 떠 있었다. 영웅이 조심스럽게 일지에 손을 얹자, 머릿속으로 일곱 개의 고대 무덤 문양이 어지럽게 밀려들어 왔다. 그중 여섯 개는 거짓된 환영이었고, 오직 하나의 문양만이 진짜 탈 라샤의 무덤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지의 마력이 해방되면서 진짜 무덤의 문양이 영웅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동시에 성역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마기 계곡으로 향하는 거대한 붉은 차원문이 입을 벌렸다. 영웅은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내며 호라드림 지팡이를 고쳐 쥐고, 바알이 갇힌 사막의 끝자락을 향해 차원문으로 몸을 던졌다.
마기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살을 에는 듯한 모래바람이 영웅의 시야를 가렸다. 거대한 암벽을 따라 일곱 개의 무덤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고, 각각의 입구에는 호라즌의 일지에서 본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영웅은 기억 속의 진짜 문양을 떠올리며 수많은 악마들을 뚫고 올바른 무덤을 찾아 나섰다.
마침내 진짜 문양이 새겨진 탈 라샤의 무덤 입구 앞에 선 영웅은 짙은 어둠의 기운을 느꼈다. 무덤 안쪽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신음 같기도 한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영웅은 지팡이를 꽉 쥐고 굳은 결의와 함께 천 년간 닫혀 있던 봉인의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탈 라샤의 무덤에 닿은 방랑자와 마리우스

영웅이 비전의 성역을 헤매고 있을 무렵, 어둠의 방랑자와 늙은 마리우스는 이미 마기 계곡의 깊은 곳에 도달해 있었다. 방랑자의 걸음은 갈수록 무거워졌고, 그의 몸에서는 핏빛 연기와 함께 악마의 형상이 겹쳐 보였다. 마리우스는 공포에 떨면서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방랑자가 진짜 탈 라샤의 무덤 입구에 다다르자 굳게 닫혀 있던 돌문이 스스로 갈라지며 길을 내어주었다. 무덤 내부는 천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차갑고 건조했으며, 벽면에는 고대 호라드림의 룬 문자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숨을 죽인 채 방랑자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 가장 깊은 봉인실에 들어서자, 거대한 기둥에 사슬로 묶인 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바쳐 파괴의 군주를 봉인한 위대한 마법사 탈 라샤였다. 그의 가슴에는 호박색으로 빛나는 바알의 영혼석이 깊숙이 박혀 있었고, 살갗은 끔찍하게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방랑자가 탈 라샤에게 다가가는 순간, 허공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대천사 티리엘이 강림했다. 티리엘의 푸른 날개가 봉인실을 환하게 밝혔고,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방랑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디아블로의 기운에 잠식된 방랑자는 끔찍한 괴성을 지르며 티리엘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대천사와 악마의 충돌로 무덤 전체가 지진이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빛의 검과 어둠의 마력이 부딪칠 때마다 파열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고, 마리우스는 공포에 질려 구석에 웅크린 채 귀를 틀어막았다. 티리엘은 방랑자를 압도하며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고, 승패는 곧 결정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사슬에 묶인 탈 라샤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며 마리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알의 영혼에 잠식된 그의 두 눈은 애처로운 빛을 띠고 있었고, 갈라진 입술 사이로 제발 자신을 이 고통에서 해방해 달라는 환청이 흘러나왔다. 마리우스의 마음속에 지독한 연민과 혼란이 소용돌이쳤다.
티리엘이 방랑자를 제압하는 데 온 정신을 쏟고 있는 사이, 마리우스는 홀린 듯이 탈 라샤의 앞으로 다가갔다. 끔찍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사내를 도와야 한다는 맹목적인 충동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마리우스의 떨리는 손이 탈 라샤의 가슴에 박힌 호박색 영혼석을 향해 천천히 뻗어 나갔다.
영혼석의 차가운 감촉이 마리우스의 손끝에 닿았다. 그는 탈 라샤의 애원하는 눈빛을 마주하며, 무언가에 홀린 듯 힘을 주어 영혼석을 뽑아내고 말았다. 그 순간 봉인실의 공기가 얼어붙었고, 탈 라샤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악마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며 천 년의 봉인이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어리석은 연민과 파괴의 군주 해방

영혼석이 뽑혀 나간 탈 라샤의 육신은 순식간에 파괴의 군주 바알의 형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끊어졌던 사슬이 바닥에 나뒹굴고, 해방된 악마의 끔찍한 마력이 무덤 안을 휩쓸었다. 마리우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뒤로 주춤거렸지만, 손에 쥔 영혼석은 이미 그의 운명을 옭아매고 있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티리엘이 절망적인 외침을 내지르며 바알을 향해 거대한 빛의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디아블로의 기운을 품은 방랑자와 완전히 해방된 바알이 동시에 대천사를 압박해 오자 전투의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티리엘의 푸른 날개가 악마들의 협공에 꺾이며 점차 빛을 잃어갔다.
바알은 기괴한 촉수를 뻗어 티리엘의 사지를 속박하고 그를 봉인실 중앙의 기둥에 짓눌렀다. 방랑자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형제와의 재회를 축하하는 듯한 기운을 내뿜었다. 티리엘은 고통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공포에 질려 완전히 굳어버린 마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대천사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마리우스에게 명령했다. 그 영혼석을 가지고 동쪽의 쿠라스트를 지나 지옥의 대장간으로 가서 그것을 파괴하라는 절박하고도 단호한 외침이었다. 마리우스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지만, 티리엘의 강렬한 의지가 담긴 시선을 결코 피할 수는 없었다.
바알이 마리우스를 향해 살기를 뿜어내려 하자, 티리엘은 남은 빛의 힘을 쥐어짜 내어 악마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 찰나의 틈을 타 마리우스는 영혼석을 가슴에 품고 미친 듯이 무덤의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천사의 비명과 악마의 웃음소리가 그의 귓가를 찢어놓았다.
마리우스가 빠져나간 직후, 바알과 방랑자는 무덤의 깊은 곳에 대천사를 가두는 결계를 쳤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맏형 메피스토가 갇혀 있는 동쪽의 밀림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천 년간 바알을 묶어두었던 감옥은 이제 티리엘을 옭아매는 절망의 구덩이로 변해버렸다.
두 대악마가 떠난 자리에는 고통의 군주 두리엘이 남아 무덤을 지키게 되었다. 거대한 곤충의 형상을 한 두리엘은 날카로운 낫 모양의 앞발을 부딪치며 끔찍한 냉기를 뿜어냈다. 그는 뒤늦게 무덤을 찾아올 인간 영웅을 찢어 발기기 위해 봉인실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을 죽였다.
마리우스는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도망치며 끊임없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했다. 손에 쥔 호박색 영혼석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불길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는 티리엘의 마지막 명령을 되뇌며,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동쪽으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에 올랐다.
고통의 군주 두리엘과 갇힌 대천사

영웅이 호라드림 지팡이를 제단에 꽂아 넣자, 거대한 굉음과 함께 봉인실로 향하는 벽이 무너져 내렸다. 먼지 구름을 뚫고 들어선 공간은 끔찍할 정도로 차가웠고, 바알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영웅을 맞이한 것은 거대한 몸집을 뒤틀며 다가오는 고통의 군주, 두리엘이었다.
두리엘이 내뿜는 서릿발 같은 오라는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영웅의 발걸음은 냉기에 얼어붙어 눈에 띄게 느려졌고, 그 틈을 타 두리엘의 거대한 낫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영웅은 간신히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아냈지만, 엄청난 충격에 뒤로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좁은 봉인실 안에서는 두리엘의 돌진을 피할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영웅은 얼어붙은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기둥 사이를 오가며 적의 공격을 분산시켰다. 두리엘이 분노하여 땅을 내리칠 때마다 천장에서 거대한 돌덩이들이 떨어져 내렸고, 전투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사투로 번져갔다.
냉기에 잠식되어 감각이 무뎌져 가는 가운데, 영웅은 품속에 챙겨둔 해빙 물약을 들이켰다. 얼어붙은 혈관에 뜨거운 기운이 돌자 굳어 있던 몸이 다시 가벼워졌다. 영웅은 두리엘이 앞발을 크게 치켜드는 순간을 노려, 그의 두꺼운 갑각 사이의 부드러운 관절을 향해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고통의 군주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지만, 영웅은 검을 놓지 않고 체중을 실어 상처를 더 깊게 찢었다. 뿜어져 나오는 역겨운 체액을 뒤집어쓰면서도 영웅은 멈추지 않고 연달아 치명타를 날렸다. 마침내 두리엘의 거대한 육신이 무너지며 봉인실의 바닥이 진동과 함께 가라앉았다.
두리엘이 죽고 지독한 냉기가 걷힌 무덤 안쪽에서 미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영웅이 조심스럽게 안쪽 방으로 들어서자, 허공에 매달린 채 결계에 갇혀 있는 대천사 티리엘의 초라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푸른 날개는 찢겨 있었고, 성스러운 갑옷은 악마들의 공격으로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영웅이 다가가 결계를 부수자 티리엘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는 인간의 영웅이 고통의 군주를 꺾은 것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너무 늦게 도착했다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바알은 이미 필멸자의 어리석은 연민 덕분에 천 년의 봉인을 깨고 해방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영웅은 자신이 지팡이를 찾아 헤매는 동안 벌어진 끔찍한 실패에 주먹을 꽉 쥐었다. 안다리엘을 꺾고 사막을 건너왔음에도 결국 악마의 해방을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티리엘은 절망할 시간이 없다며, 아직 영혼석을 가진 마리우스가 살아있으니 희망은 남아있다고 영웅을 독려했다.
동쪽의 밀림을 향한 새로운 추격

티리엘은 디아블로와 바알이 그들의 맏형인 증오의 군주 메피스토를 해방하기 위해 동쪽의 쿠라스트로 향했다고 설명했다. 세 대악마가 하나로 뭉치게 되면 성역은 물론 드높은 천상조차 감당하기 힘든 재앙이 닥칠 것이 분명했다. 대천사의 목소리에는 이전에 없던 다급함과 짙은 우려가 배어 있었다.
영웅은 티리엘의 경고를 새겨들으며 부러진 검의 날을 다듬고 방패의 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사막에서의 헛된 추격이 남긴 뼈아픈 실패를 가슴 깊이 새기며, 이번에야말로 악마들의 발걸음을 끊어놓겠다고 다짐했다. 티리엘은 영웅에게 빛의 축복을 내리며 서둘러 루트 골레인으로 돌아가라 일렀다.
무덤을 빠져나와 도시로 돌아온 영웅을 맞이한 것은 제르힌 왕과 데커드 케인이었다. 영웅이 전한 바알의 해방 소식에 케인은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늙은 학자는 쿠라스트의 자카룸 교단이 이미 메피스토의 타락에 물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대비를 서둘렀다.
제르힌 왕은 영웅의 헌신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동쪽으로 향할 수 있도록 메샤프의 배를 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사막의 보석은 영웅 덕분에 어둠에서 벗어났지만, 세상의 명운은 이제 바다 건너 밀림의 땅에 달려 있었다. 백성들은 항구로 향하는 영웅의 뒷모습을 향해 무언의 응원을 보냈다.
항구에 정박해 있던 선장 메샤프는 돛을 올리며 출항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영웅과 케인을 배에 태우고, 험난한 쌍둥이 바다를 건너 동쪽 대륙으로 향하는 뱃길에 올랐다. 짠내 나는 바닷바람이 영웅의 뺨을 스쳤고, 멀어지는 루트 골레인의 전경이 붉은 석양빛에 물들어갔다.
배의 갑판에 선 영웅은 수평선 너머로 짙게 깔린 먹구름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방랑자와 해방된 바알, 그리고 영혼석의 무게에 짓눌려 도망치고 있을 늙은 마리우스가 있을 것이다. 영웅의 심장 속에는 두리엘이 남긴 서늘한 공포 대신, 대악마들을 멸하겠다는 뜨거운 투지가 불타올랐다.
케인은 갑판 한편에서 낡은 양피지를 펼치고 쿠라스트의 밀림과 트라빈칼의 지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메피스토의 증오가 얼마나 교묘하게 인간의 마음을 파고드는지 경고하며, 다음 전투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을 갉아먹는 시련이 될 것이라 조언했다. 영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돛을 가득 채운 바람을 타고 배는 검은 파도를 가르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사막의 무덤에서 놓쳐버린 파괴의 손길은 이미 밀림의 심장부로 뻗어가고 있었지만, 추격자의 의지 또한 결코 꺾이지 않았다. 다가올 피비린내 나는 증오의 땅을 향해, 영웅은 굳건한 눈빛으로 어둠이 내린 바다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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